●──── 신약강론/로마서

제21강 로마서 3:27-31 율법의 행위와 믿음

불편한 진리 2019. 9. 22. 22:42

 로마서 스물한 번째 강론


로마서 3:27-31

율법의 행위와 믿음

 

우리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5:20)라는 예수님의 선언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당시 최고의 의를 자랑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어떻게 더 나은 의를 갖출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사망 가운데서 우리는 생명에 대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명확하지만 바울 사도는 오히려 그 사실 위에 위대한 반전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1).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율법과는 차원이 다른 의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신 그 피로써 성취된 일이라는 뜻에서 바울은 과거완료시제로 썼다.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어서 쟁취하는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누리는 의라는 뜻이다. 성도란 전혀 의롭지 못한 자가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의가 된 자이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하였다(26).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7-28). 생명을 누리는 일에 자신의 행위가 있었다면 우리에게 수 많은 자랑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믿음에 의한 것이기에 우리의 행위로 인한 자랑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인간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만 여기고 선민이라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이것은 모든 죄인들의 보편적 속성이다.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의가 되었기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위를 믿음으로 포장하여 자랑한다. 야고보 사도는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4:16)라고 하였다. 모든 자랑거리 자체가 죄 아래에서 나오는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에 헛된 것이고 악한 것인데 그 자랑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라고 한 것은 죄인은 자랑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율법의 행위 믿음을 대조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행위 믿음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강론을 하면서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본문에서 말씀하는 믿음이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흔히 나는 믿는데 너는 왜 못 믿느냐고 말하는데 이때 내가 믿는 믿음은 나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은 분명 율법의 행위에 대비된 것으로써의 믿음을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율법적 행위 예수님의 믿음으로 대조하여 설명한 것이다.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는 말씀은 바울이 단순하게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헬라어 로기조마이라는 말인데 아주 신중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을 뜻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적 행위로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그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에 합류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인한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서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5:44)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믿은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것이 말씀을 맡은 자의 할 일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하나님이 자신들에게만 율법을 주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율법과 할례가 자랑거리가 되었는데 결국 그것으로 인해 죄인들은 율법적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으로 온전히 다 드러났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모든 죄인들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폭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음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29).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동일하게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말씀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의 믿음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30)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명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언약하신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구약의 하나님이나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 아닌 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말해야 하는가? 한 마디로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말해야 한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 아주 명확하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8-10)


 

여기서 선물이란 표현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도를 지니고 등장한 표현이다.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면 자기 행위라고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을 언급한 이유는 구약의 하나님이 다르고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물로써 주어진 믿음은 선한 일로 나아간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지는 하늘적 일, 즉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서든지 하늘의 생명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물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질 문제라면 부추김과 교육과 훈련 성과에 따라 차등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즉 차등화란 선한 일을 관계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양적 개념으로 취급해 버리기 때문에 나오는 발상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랑치 못한다는 은혜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상황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죄요 그것이 바로 율법적 행위이다. 율법적 행위를 설명하자면 바울 자신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4-9)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부르신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 그것은 곧 더 이상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이 은혜이다. 예수님의 믿음이 주어지니 비로소 나는 믿음이 없는 존재이며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는 자라는 것이 드러날 뿐이다. 나는 늘 나를 믿고 나의 행위를 자랑하며 나 밖에 모르는 죄인이었는데 이상하게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믿음,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있더라는 것이다.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아니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다른 기적을 요구한다는 것은 아직 이 큰 기적을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 큰 은혜의 기적을 받은 자는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질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서도 그것을 전혀 자랑거리로 삼지 않는 것이 성도의 특징이다. 흔히 말하듯이 십계명을 다 지킬 수는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성도에게 있을 수 없는 현상이어야 한다. 율법의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 자체가 율법의 말씀을 이루신 하나님의 의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1)라고 선언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5:17)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이 근본적으로 지향하고 보여주고자 했던 하늘의 실체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말씀의 온전한 성취이다. 굳게 세운다(, 히스테미)라는 말은 언약을 세운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하여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은 이런 뜻에서 하는 말씀이다. 즉 우리가 율법을 다시 귀중하게 여기고 율법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의도하고 지향하고 있었던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굳게 내세우는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20-21)

 

(20190922 강론/김영대).



롬21.0327-31 율법의 행위와 믿음(20190922).pdf


롬21.0327-31 율법의 행위와 믿음(20190922).pdf
0.1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