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스물세 번째 강론
로마서 4:4-9
다윗이 말한 복
마태복음 20:1-16에는 “포도원 품꾼을 얻는 집 주인 비유”가 나온다. 포도원 주인은 오전 9시와 12시, 오후 3시에 나가서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일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인이 오후 5시에도 나가서 품꾼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더더욱 주인이 상식적이지 않게 이상한 것은 오후 5시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주기 시작하였는데 모두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두 시간 일한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먼저 온 자들이 불만을 표출하였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 20:12)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인의 답변은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 20:13-14)라고 하였다.
하루 종일 가장 많이 일하였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품꾼의 모습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20:27)라고 물으며 맨 처음 제자로서 예수님의 사역 기간 내내 누구보다 더 많은 일을 하였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많은 보상을 기대하는 베드로의 모습이었고 더 나아가서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을 누구보다 더 열심히 섬기며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의 모습이었고 그것은 곧 모든 인간들의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한 데나리온은 집주인이 죄인들에게 베푸는 자비와 은혜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천국은 세상의 질서 원리와는 다른 새로운 원리, 그것은 곧 집주인의 뜻에 의해 주어지는 자비와 은혜이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들이 천국의 비밀을 밝혀주는 비유라면 이 비유 역시 천국 비유로써 집주인이 보여주신 자비와 은혜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임한 천국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천국은 십자가의 은혜가 주인의 뜻에 의해 주어지는 나라이다.
예수님께서 나타내 주신 나라가 그러할진대 바울 사도가 어찌 다른 나라를 말할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행한 보상이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주어진 은혜였기에 아브라함의 믿음 즉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믿음을 이제 은혜로 설명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5절). 여기서 “일”이란 율법적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며 “삯”(헬, 미스도스)이란 우리 성경에서 상 혹은 상급으로 번역된 말로 ‘대가’, ‘보상’을 뜻한다.
서두에서 살펴본 “포도원 품꾼을 얻는 집주인 비유”에서도 분명 일한 자는 삯을 기대하게 되어 있다.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많은 삯을 기대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인간의 죄성을 철저히 공박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전혀 의롭지 않는 그를 하늘의 의를 덧입는 믿음의 자리까지 이끄셨다. 이 모든 근거를 나타내는 말이 은혜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신이 일한 것, 즉 율법적 행위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 오늘날도 동일하게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후손이다(갈 3:16, 3:29).
내 죄에 대한 처리 방법, 이것을 처리할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의를 빼앗아 올 방법이나 능력이 내게는 없다. 믿음이 마치 상대방의 능력을 내 마음대로 주무르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우리의 믿음이란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나 방법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만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하늘의 의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성령에 의해 깨달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내가 성경을 공부하고 알아서 믿었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흔히들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는 십자가로 완성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고 깨달아서 알 수 있지만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구원 얻는 일에 장애가 되거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오늘날 우리는 구약 성도들보다 더 많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더 분명히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것이 다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분명히 알고 더 폭넓게 알 수 있다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구원이 더욱더 확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구원의 방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얻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 얻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을 아브라함으로 잡는다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다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은 다윗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1:1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역사를 말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요약하여 설명하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이다.
아브라함과 같이 다윗도 같은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를 구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의의 본질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6절)라고 하면서 율법을 행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그런 사람의 복됨에 대해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7-8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겨주신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고, 그 복을 다윗이 말하고 있는데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1 [다윗의 마스길]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여기서 바울 사도는 믿음의 의가 어떠한 성격의 것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곧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이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주어지는 의가 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여기신다”(헬, ‘로기조마이’)라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3,4,5,6,8,9,10,11절). ‘로기조마이’의 문자적으로는 ‘계산하다’, ‘포함하다’, ‘짐작하다’, ‘떠맡기다’, ‘놓다’, ‘헤아리다’, ‘추리하다’라는 무수한 뜻이 있지만 이 말은 ‘로고스’(말씀)에서 유래된 단어로 ‘아주 신중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중히 생각한 끝에 내리신 결론이다. 이는 결코 우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 안에 그리고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 안에 있는 것이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주신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8-13)
다윗이 하나님의 집(성전)을 건축하고자 하였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왕조)을 짓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곧 다윗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실 언약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으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 7:28-29)
흔히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 가정에 세상의 온갖 복을 다 주실 것으로 오해하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복으로 이해하였다. 이 말씀과 함께 바울 사도가 인용한 시편 32:1-2의 말씀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다윗이 알게 된 복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고 그 언약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시되 자신의 후손(가문)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자신의 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은혜로 베풀어지는 것이기에 그것을 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다윗이 말한 복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죄가 가려진 상태,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은 상태가 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상태이다. 성경은 이 복 역시 다윗에게 뜬금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주어진 것이었다(창 12:1-3).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9절)라고 선언하면서 의롭다고 여겨지는 복이 할례를 받은 자에만 주어진 것이냐고 묻는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밝힌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우리의 율법적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진 하늘의 의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오늘날 우리가 믿음으로 받게 된 하나님의 의를 에베소서에서 신령한 복으로 선포한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20191006 강론/김영대).✞
롬23.0404-09 다윗이 말한 복(2019100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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