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20강 로마서 3:23-26 그의 피로써

불편한 진리 2019. 9. 9. 07:17

로마서 스무 번째 강론


로마서 3:23-26 

그의 피로써

 

인간은 왜 율법 안에서 다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율법이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란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이기 때문에 악한 세력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 한계를 폭로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의에 도무지 근접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3:21에서 위대한 반전의 표현으로 그러나 이제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인간이 율법으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자기 의와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의이다. 즉 차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세계가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는 차원이 다른 예수 그리스도로 이제 역사 속에 온전히 다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사견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이미 증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로서 누구에게든지 차별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의 믿음에 의한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 자체가 차별이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차별이 없는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니 죄인에게 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설명한다.


본문 23-24절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선언한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말씀하는데 공동번역에 보면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라곱 번역하였다. 단순히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아담만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죄를 범하는 인간들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 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을 이루셨다고 선언한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든지 하나님을 찾아 나섰을 때에 하나님께서 속량을 이루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1도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으로 바꾸는 전문가인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이 구속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라고 하였다.


속량(, 아폴뤼트로시스)이란 아포’(멀리떨어져서, ~로부터 멀리)뤼트론’(속전값, 몸값, 석방금)의 합성어로 구속 행위’, ‘해방이라는 뜻인데 석방금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란 무엇이며 속전을 무엇으로 치루셨는가? 그것을 25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밝히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속량을 이루셨는데 왜 예수님의 피로써 속전을 이루셔야 했는가? 레위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7:11)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이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말미암은 결과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우리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되신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그 죽음의 증거로 우리가 죽는 것이다. 때문에 죄를 극복하고 죄를 속하는 생명은 죽음에 대한 속전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 속에 담아 놓고 자신이 친히 이루실 것을 희생 제사의 제물을 통해 보여 주셨다. 이런 점에서 피가 죄를 속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피에 대하여 구별하라고 하셨다. 피를 함부로 대하는 자가 있다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 곧 피로써 구속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아무나 피를 흘리면 되지 않는가? 왜 아무 피나 되지 않는가? 다시 말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이나 그들이 동물을 잡아서 드린 피는 왜 안 되고 메시아가 와서 희생해야 된다고 약속하고 있는가? 히브리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7:27-28)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인이 흘리는 피로써는 죄 사함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셔야 되었다. 하나님의 오심을 아들이 오셔서 피를 흘려야 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9:22). 이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포하였다(1:29).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 어린 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희생을 전제하고 있다는 뜻이다(참고 고전 5:7).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유월절 만찬에서 이렇게 나타내셨다.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6-28)

 


이는 21절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라고 말씀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십자가 사건이란 하나님께서 순간적인 발상에 의해 이루어진 구속 사건이 아니다. 구약에서 증거하고 있는 모든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이다. 즉 구약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세우는 언약이라는 뜻이다. 출애굽 때에 잡았던 유월절 어린 양의 피 흘림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언약의 피는 하나님께서 자기 죽음으로 이루시는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누가복음에서도 이렇게 말씀한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서 흘리시는 피 그것만 새 언약의 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이 구약에서 말씀하신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실로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기를 위한 제사를 드려야 했다. 자기를 위한 제사가 있어야 했다는 것은 구약의 어떤 인물도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죄인이라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반복된 제사는 새 언약의 성취자가 되실 분을 계속 보여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피로 단번에 제사를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다(9:12-14).


여기서 화목제물(, 힐라스테리온)이란 출애굽기 25:17-22에 나오는 속죄소라는 표현이다. 속죄소는 언약궤를 덮는 덮개인데 속죄제를 드릴 때 피를 뿌리게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의 속죄소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하였는데 세우셨다’(, 프로티데마이)는 말은 프로’(~앞에)티데미’(배열하다)의 합성어로 어떤 목적을 위해 잘 배열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이 단어를 에베소서 1:9에서는 예정이라고 번역하였다). 즉 구약에서 속죄를 위해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피를 흘리실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배열한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25절 하반부에서부터 26절에서 밝혀 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5b-26). 십자가의 속량으로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인내로 이전의 죄를 지나가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간 것처럼 이스라엘의 죄를 지나가신 것이다. 이전의 죄를 넘어가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기 위한 증거로 구약 시대에 언약을 주시고 새 언약으로 언약을 성취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셨다. 그 방식은 오직 아들이 피 흘리는 방식인 십자가였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인 반면 또한 하나님의 의의 증거이다. 이 증거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의 안에서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주신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4:16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와 헬라어로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본문도 예수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번역을 해야 되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속한 자도 동일하게 의롭게 만드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피는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단어이기에 오늘날 교회는 피를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차별없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 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복음을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말한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매력이 없어 보인다. 아니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으로 여긴다. 내 구원을 더 빛내줄 찬란한 상급도 있어야 되겠고 그것을 위해 성경을 잘 가르쳐 주고 설교 잘하는 목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유포되고 있는 복음은 피가 없는 가짜 복음이다.


성도란 무엇을 해서 얻는 자가 아니라 그저 은혜를 입은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속한 자란 복음 안에서 내게 아무 것도 없고 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 쪽에서 무엇인가 붙잡고 있는 것으로 안심하고 만족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피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다. 성도는 십자가의 피 뿌림을 받은 자이기에 피의 요구대로 살게 되어 있다. 피의 요구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죽음에 넘겨진 상태에 있지만 하늘의 의에 속한 감사로 살아지는 것이다(20190908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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