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열여덟 번째 강론
로마서 3:9-18
그러면 우리는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선포하면서 1:18부터 시작하여 2:29에 이르기까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죄를 고발하였다. 특히 율법과 할례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죄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폭로하였다. 그러면서 3장에 와서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했다. 범사에 많은데 가장 먼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유대인의 나음이란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겨주셨다는 것인데 이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담아내고 보여주어야 했지만 그들의 신실하지 못함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실패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 것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유대인의 못남과 실패를 드러내셨다고 바울 사도는 단언하였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주신 것은 율법 아래에서는 그 어떤 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룰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대표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율법을 주신다 하더라도 죄인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더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죽이자고 한 것도 아니고 살리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스라엘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만이 의가 되시고 진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실 뿐이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셔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곧 십자가에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도 아니었고, 이방인도 아니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런 점에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의도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십자가를 계시하시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절). 그러면 이방인인 우리는 어떤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유대인의 나음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나으냐”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우리는 어떤 변호를 할 수 있느냐?’라는 말이다. 말씀을 맡았던 유대인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선언되었다면 우리는 더더욱 자신을 변호할 말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란 바울 사도 자신을 포함한 로마교회 성도들 뿐만 아니라 이 서신을 읽는 모든 자들이다.
바울 사도의 답변은 단호하다. 결코 아니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죄 아래”라는 말이다. “죄”라는 말을 온 인류의 죄에 대하여 다 공박한다는 의미에서 ‘죄들’이라고 하지 않고 ‘죄’라고 단수로 쓰고 있다. 이는 단순히 죄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죄의 권세자인 사단에 의해 매여 있는 상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참고 요 8:34).
인간은 본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아래” 있었으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취하여 “죄 아래” 있게 되었다. 죄란 단순히 내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바르게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으로 내게서 나오거나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긋나 있고 못미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죄는 힘이요 권세이다. 곧 마귀의 세력이며 그 세력 아래 붙잡혀 있는 상태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10절 이하에서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보여준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0-12절). 인용한 구약의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1[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에 맞춘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13-14절)
8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 5:8-9)
1[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2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3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셀라)(시 140:1-3)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시 10:7)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15-17절)
7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7-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8절).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시 36:1)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죄들을 지으면 하나님과 관계없다는 것이 아니다.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 모든 인간의 현실적인 형편이라는 뜻이다. 이런 것들을 행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였다. 죄의 권세에 끌려가고 있기에 이러한 죄들이 우리 안에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없고”, “없다”는 말을 7번이나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목구멍은 열린 무덤으로 혀로는 속임을 일삼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르다고 하였다. 열린 무덤이란, 이스라엘의 무덤은 동굴을 파서 시신을 넣고 입구를 돌로 막는 방식의 무덤인데 그 입구가 열려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거기서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이 입을 열어 좋은 말을 한 적이 있는가? 입만 열었다 하면 전부 자기 치장의 말과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썩은 것들을 내뱉을 뿐이다. 찬송가 23장의 가사를 보면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만 입이 아니라 한 입 가지고도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목구멍, 혀, 입술, 입이라는 같은 표현을 달리하면서 우리의 말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본문은 입 뿐만 아니라 발에 대해서도 표현하였는데 발이란 우리의 행동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말과 행동을 다 통털어서 죄를 발산하는 것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는 눈에 대해서도 말씀한다. 왜 눈에 대해서 굳이 표현하여야 할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한 인간이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창 3:7)라고 하였는데 눈이 밝아져 하나님께서 벗겨놓은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 대하여는 눈이 어두워진 것이었다. 마태복음 6:19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시면서 21절에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하시며 22절에서 눈에 대해 언급하셨다. 즉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와 관계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눈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는 모든 시선이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2:25에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고 하였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인의 본성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인데 여기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본능적인 어둠의 땅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겨 주셨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사실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더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 편에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넣어 주실 뿐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은혜로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죄 아래 있다는 실상을 먼저 알려주신다. 죄 아래 있음을 먼저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나의 믿음으로 쟁취했다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죄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은혜 아래(롬 6:14) 있다는 사실도 모르며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롬 3:19)에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바울 사도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순서일 뿐이지 하나님의 일하심의 측면에서 보자면 십자가 은혜가 주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특권이나 유익이란 무엇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가 나으냐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선악과를 물고 태어난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더라도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상대와 비교하여 더 나은 죄인, 조금 더 착한 죄인, 수준이 높은 죄인 그런 것은 없다. 누구에게나 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타나야 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부르심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어 두셨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존재이다(20190818 강론/김영대).✞
롬18.0309-18 그러면 우리는(201908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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