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22강 로마서 4:1-3 아브라함의 믿음

불편한 진리 2019. 9. 30. 09:48

❖ 로마서 스물두 번째 강론


로마서 4:1-3
아브라함의 믿음


오늘날 사회를 일컬어 흔히 “정보화 시대”라고 한다. 얼마만큼의 실력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보다 더 빨리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들고 활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남보다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을 활용하고 그것을 통한 정보 교환은 아주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도 정보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공부를 통해 더 많은 정보들을 확보하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천국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은 우리가 가진 정보에 의해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졌다면 이미 천국에 살고 있는 자이다. 천국은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우리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주도권이 철저히 하나님께 있는 하나님의 왕국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의나 우리의 방법, 이 땅의 법칙에 의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로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것을 3:21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하였는데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였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다면 이것은 신약에만 적용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인 구약에는 적용되지 않는가? 율법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의라면 구약 시대에는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문을 바울 사도는 스스로 제기하면서 복음을 설명한다.


의외로 교인들 중에서도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다. 물론 말이야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동일하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믿음의 질을 다르게 설명하거나 구원의 방식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이다. 예컨대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신약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율법(소위 말하는 도덕법이라는 십계명)을 지켜 순종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3:29에서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한 구원의 방식이 하나 뿐이다. 뿐만 아니라 3:21에서도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라고 하였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은 우발적인 사건이거나 하나님의 계획이 이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발상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으로 이미 구약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즉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동일한 하나님의 방식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 4장 이하의 내용이다. 그 설명을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 말씀한다.


3절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저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이해함에 있어서 너무 쉽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덮어놓고 믿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5:6에 나오는 말씀인데 우리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기록된 배경과 전후 문맥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 15:4-7)


우리는 창세기를 읽을 때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떤 인물을 어떻게 구원하였는가 하는 구원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계시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시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에 대한 기사를 단순히 아브라함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의 한 부분이나 단면만 보아서는 안 되고 아브라함 생애 전체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내용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동물을 쪼개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는 언약 의식을 통해 확인시켜 주시는데 사실 이 언약의 말씀은 이미 창세기 12장에서 주신 언약을 언약식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주실 때에 아브라함이 믿었었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수 24:2-3)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였다. 가나안 땅에 믿음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창 12:5). 그러나 그 땅은 기근이 심한 상태였기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애굽 왕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책망하시기보다 사라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롯과 결별하게 하신 후 언약의 말씀을 주심으로 또 확인시키셨다(창 13:14-17).


이쯤에서 아브라함은 적어도 자신의 몸을 통해 주시는 후손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믿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과 사라와의 사이에 주실 후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셔서 아브라함의 능력이나 인간적 조건에 의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이삭을 주시고 후에 그를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떤가를 하나님이 몰라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나 최종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삭의 번제 사건을 통해 숫양으로 대신하심으로 언약의 실체가 오셔서 희생을 이루어야 함을 보여주셨다.


언약의 희생자란 자신이 드린 아들 이삭이 아니라 이삭의 후손을 통해 오실 분이 희생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삭도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누군가 언약의 후손이 오셔서 희생하는 것을 통해 아브라함 자신에게 주신 언약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바라보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신약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결국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로 하여금 언약을 받아 들이는 자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내용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서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께 나타내고 보여 주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아들 이삭의 후손으로 오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바라 보았고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집어 넣으신 것이었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믿음을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믿음으로 성경은 말씀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 있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다는 차원에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이었다. 전혀 의롭지 않은 상태에서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은 묵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1절에 의하면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하였다. 여기서 “육신”이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죄인이 의지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육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은 세상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장애물 경기에서 장애물을 뛰어넘어서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독교 계통 학교의 출신이기 때문에, 모태 신앙이기 때문에, 옛날에 세례 받아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선교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한 것 때문에 아니면 기도 한 것이나 교회에 열심히 봉사한 것 때문이라든지 자신이 예수를 믿을만한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2절)라고 하였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이 없었다면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2-14)


구약 시대이든 신약 시대이든 동일하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를 은혜로 베푸셔서 이루시는 구원이기에 내 쪽에서의 구원의 근거는 전혀 없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진 예수님의 믿음인 것을 늘 확인하면서 사는 성도여야 할 것이다(20190929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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