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19강 로마서 3:19-22 율법 외에 한 의

불편한 진리 2019. 9. 2. 11:45

❖ 로마서 열아홉 번째 강론


로마서 3:19-22

율법 외에 한 의


복음이 왜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혀있기 때문이라고 바울 사도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선포하였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19절). “율법 아래”라고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성경 그대로 표현하면 ‘율법 안에’라는 말이다. 이제까지 율법을 이야기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죄에 대해 말한 이유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율법 안에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하여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는 존재로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이때까지 바울 사도가 죄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고 적나라하게 말한 것은 입을 막는 작업이었다. 인간의 죄에 대해 이렇게 구체적으로 공개되고 보니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더라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천’자, 구원이라는 ‘구’자도 한 마디 꺼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20절)는 말씀이 인간의 죄에 대한 결론이다. 


율법으로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없고 다만 율법으로 죄를 깨달을 뿐이다. 율법을 통해서 보니까 우리 자신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게 행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율법을 통해서 본 인간의 본질이다. 뭐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인간이 아니라 죄만 짓는 존재로 드러났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까지만 본다면 인간은 절망이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여기서 엄청나게 큰 반전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1절).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 하나님의 의가 왜 나타나야 되었는가 하는 것을 이제까지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의가 하늘에서 계시되어 주어져야 할 이유는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 와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한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 성경에는 헬라어 ‘뉘니 데’에서 ‘데’(그러나)를 번역하지 않았는데 바울 사도는 이 반전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죄에 대하여 말하며 율법 안에서는 희망이 없었는데 율법을 능가하고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많이 쓰고 있다.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1-22)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5-6)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9-20)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그러나)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1-22)



이런 점에서 말씀을 강론하는 입장에서 모일 때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는 존재임을 선포할 수밖에 없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고 또한 말씀을 전하는 자가 이렇게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죄에 대한 대안이 복음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는가? 


바울 사도는 그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절). 이 말씀을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믿음을 예수님의 소유격으로 쓰고 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고 주어졌는데 누구의 믿음을 통해서인가? 우리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차별없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라고 한 것은 구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다. 구속이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두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십자가로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믿음이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찾아와 주셔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를 이루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지 믿는 우리가 어떤 행위를 가지고 의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다. 때문에 의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21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라고 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성경이 의라고 하는 것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선지자 말라기는 메시아가 오셔서 죄사함을 가져오는 것을 “공의로운 해”가 떠오른다고 선포하였고(말 4:2),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라고 하였다. 우리 인간의 믿음이나 행위를 의라고 하지 않고 메시아의 사역이 죄사함을 가져올 것을 가리켜 “의”가 온다고 예언하였다. 


예레미야 23:5-6에서도 “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하였다. 메시아가 다스리는 시대의 특징을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일컫는다. 메시아의 의로운 통치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그리스도)로서 구약에서 예언한 약속의 성취자로서 의를 온전히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 3:15에서는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으실 때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물 세례를 받으신 것은 십자가를 질 것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만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회개해야 할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 분이 이루시는 대속 사역이 의를 이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십자가 사역을 예수님은 세례라고 하셨다(막 10:38).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할 것을 예시하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서 의가 이루어졌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니까 우리가 그것을 단번에 척 알아먹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의를 나타내셨고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성도로 삼으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믿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서 그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에 참여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나오게 된 고백이지 나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는다는 것을 교회를 위해서나 목사를 위해서 온갖 행위를 하는 것으로 믿음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신념이고 자기의 소신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도 않고 또 믿는 것 같다가도 믿지 않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는 중에서도 날마다 다시 십자가로 관심이 돌려지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셔서 우리의 의가 되셨다는 은혜를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전혀 희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 말뚝을 박고 있던 우리들에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은 없다. 아니 이것 외에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그것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있는가? 날마다 완벽하게 세상의 것을 부정하고 살아야 성도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성도에게도 세상의 것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으로 보이는 때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십자가가 눈 앞에 어른거리며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려진다면 감사하면서 성도로 살아갈 따름이다.

 

죄를 안다는 것이 복음은 아니다. 오히려 죄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자랑할 것이 아니라 복음 앞에 할 말이 없는 자가 성도이다. 죄를 안다는 것은 그 다음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물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의는 차별이 없고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의는 나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부터 받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받아 누리게 된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자라면 차별없이 주어진 의로 십자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던 의이기 때문이다(20190901,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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