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69강 로마서 13:11-14 그리스도로 옷 입고

불편한 진리 2022. 3. 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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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예순아홉 번째 강론

로마서 13:11-14

그리스도로 옷 입고

 

성경은 묵시를 이 땅의 언어로 나타내고 있다. 하늘의 계시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용어들은 세상의 개념이나 정의를 가지고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것 때문에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하라, 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 무조건 우리의 행위로 실천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문자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오늘 본문 같은 곳에서 ‘잔다, 밤, 낮, 빛, 어둠’ 등의 표현에는 ‘영적’이라는 말을 붙인다. 영적 잠에서 깨어야 하고 영적 어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게 말하자면 성경에 영적이 아닌 것이 있는가? 영적이란 성령을 통해 나타내신 것이라는 의미로 보자면 하늘의 것을 이 땅의 것들로 비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자적이거나 영적인 것으로 나누어서 내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관점으로 성경을 대할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을 통해 본질적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하라’와 ‘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이전의 강론에서 이미 확인했던 것처럼 ‘하지 말라’를 통해 이 땅의 죄악상을 보여주고 ‘하라’라는 말씀을 통해 하늘의 왕국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결국 하라와 하지 말라는 말씀은 언약의 종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성취하신다는 것이 본질이다.

흔히 예수를 믿은 이후에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죄의 권세에 끌려가고 있다는 성경의 선언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나올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이웃이 되어 찾아오셨다. 그러므로 율법에 충만하게 채워진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로 온전히 다 드러난 것이기에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만 본다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 완성이라는 의미에서 계속 말을 이어간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절)라고 하였는데 “이 시기”란 헬라어로 ‘카이로스’(시간, 시점, 순간)인데 헬라어에서 시간이란 뜻을 가진 또 다른 단어 ‘크로노스’가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로 생각하는 역사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결정적이거나 특별한 한 정점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란 어떤 의미인가? 예수께서 이 땅에 자신을 복음으로 처음 드러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여기서 “때”란 ‘카이로스’이고 “찼다”라는 표현이 완성이라는 뜻의 ‘플레로오’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셨던 어떤 특별한 한 정점의 완성을 선포하셨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나라를 정의할 때 ‘하나님의 통치’라는 차원에서만 생각하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역사상 어느 때에 하나님의 통치가 없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 나라란 어떤 의미인가?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것은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날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로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모든 날의 마지막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셨다면 세상의 끝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는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 아들로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안에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아 통치하는 방식’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는 “아들의 나라”라고 하였다(골 1:13).

이미 11:36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한 바와 같이 역사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완성 안에 있다는 것이고, 모든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한 “이 시기”란 바로 지금, 오늘이라는 때이다. 이것을 종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사야 49:8을 인용하여 이렇게 선포하였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십자가 사건과 다시 오시는 재림을 한꺼번에 보면서 말씀한다. 따로 떼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차원에서 단번에 십자가에 자신을 드리신 것과 다시 나타나시는 것을 같이 묶어서 말씀하였다. 십자가 사건이 저 멀리 있고 재림이 다시 한참 후에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시간의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시간의 개념 속에 묶여 있는 인간들에게는 시간의 거리가 한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 안에는 시간의 개념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때의 개념으로 말씀한 것이다.

성경에서 ‘잔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적인 잠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의미한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우리의 의지로 불가능하듯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의지로 불가능한 것이기에 깨워주어야 하고 살려주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잔다’ 혹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참고 엡 5: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웃으로 받아주신 사랑에 의해 율법의 완성 안에 있는 존재라면 이제 우리는 자다가 깨어 있는 상태의 때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구원의 이때를 아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절)라고 하였는데 “깊고”(헬, 프로콥토)라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전진하다, 앞으로 나아가다’라는 뜻이고, “낮”이라는 말은 ‘날’(헬, 헤메라)이라는 말이다. 밤에서 더 나아가 날이 가까웠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을 이미 온 것으로 말씀하신 측면에서 보자면 날이 이미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우리 성경에 “어둠의 일”이라고 하였는데 어둠의 ‘행위’를 의미하고 “빛의 갑옷”을 직역하면 ‘빛의 무기’라는 말이다. 또한 “입자”(헬, 엔뒤오)라는 말은 ‘안으로 들어가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가정법 과거 중간태로 쓰였다. 즉 어둠의 행위(일)를 벗어버리고 빛의 무기(갑옷) 안으로 들어가 있다면 밤에서 더 나아가 구원의 날이 이미 주어진 상태라는 뜻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어서 한 문장으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절)라고 선언한다. “단정히 행하고”(헬, 유스케모노스)라는 말은 ‘은혜가 충만하다’(헬, 유케몬)에서 온 단어이다. ‘밤-낮, 어둠-빛, 벗는 것-입는 것, 단정히 행하는 것-방탕/술 취함, 음란/호색, 다툼/시기, 예수 그리스도-육체’를 대조하고 있다. 밤과 어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이 여섯 가지도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비유적 의미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빛의 무기 안에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어둠의 행위인데 그것은 이미 9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행위를 표현한 것이다.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옷 안에 들어가 있다면 정욕을 향하여 육의 것을 계획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상태가 아니라면 그것은 곧 육의 상태에서 육의 것을 계획하는 일들이 된다는 뜻이다. 육의 상태에서는 항상 자기 정욕을 향하여 모든 일들을 계획한다.

그러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옷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인데 구약에서 옷을 입는 것으로 새로운 모습을 나타낸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아론이 죽을 때에 대제사장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혔다(민 20:26). 아론이라는 대제사장이 죽고 난 뒤에 그 아들이 아버지가 평소에 입었던 대제사장 복장을 취하여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의 일을 할 수 있었다. 대제사장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을 옷을 입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 땅에 가셔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이적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눅 8:27)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이후 고침을 받은 상태를 “귀신이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눅 8:35)라고 표현하였다. 즉 귀신의 권세에 매인 상태를 옷을 벗고 있는 상태, 고침을 받아 귀신의 권세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 장악된 상태를 옷을 입은 것으로 나타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존재임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같은 운명에 놓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그대로 간다는 뜻이다.

8절과 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는데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인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한다는 것은 탁월한 하늘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인데 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리신 말씀의 섬김이 탁월한 하늘의 권세였으며 그 권세에 의해 우리를 이웃으로 받아 사랑을 나타내신 이것이 율법을 온전히 채워 완성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통일되는 완성이다. 그 완성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함몰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들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응답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안에 들어간 자라고 표현한 것이다.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3-1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의 무기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내가 잘 활용하여 세상에서 이겨보자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닌 말씀에 의해 살아지는 자이다(2022032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69.1311-14 그리스도로 옷 입고(2022032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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