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70강 로마서 14:1-6 주를 위하여

불편한 진리 2022. 3. 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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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일흔 번째 강론

로마서 14:1-6

주를 위하여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그 믿음은 나의 행위에 불과하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우리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 계속 확인하고 있다. 누군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다(1:17, 3:22). 그렇다면 오늘 본문 1절에서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면 반대로 강한 자도 있다는 말인가?

직역하면 ‘그러나 병들어 힘없는 자를 믿음에로 영접하여 그의 생각들을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이다. 13:14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목적으로 육의 것을 계획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육의 것을 계획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연약한 자를 거부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절에서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붙이고 있다.

여기서 표현된 “연약한 자”란 말은 일반적으로 ‘병들다, 힘이 없다’라는 뜻인데 성경적 입장에서 말하자면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2절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문맥적으로 보자면 어떤 음식에 대해 먹을 수 있고 없는 문제를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병들어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없는 자를 “연약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로마 시대에는 신화에 의한 많은 우상들이 있었고, 모든 육류나 어류는 그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후에 시장에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취한다는 것은 우상을 인정하고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전 10:25-28)

 

 

이런 말씀을 보면 상당히 애매하다. 시장에 나와 있는 어떤 고기도 다 우상 제물이다. 그런데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것이 우상 제물이라고 말하면 먹지 말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4-6)

 

 

성도에게 있어서 우상이란 없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데 어떻게 우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없는 신을 인간들이 오해하여 만들어 섬기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란 성도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신에게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서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판단한다는 것 자체는 그 판단하는 사람의 관심이 사람에게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비판”이란 말은 ‘심판’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라는 말은 구원받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실 일이지 죄인들이 심판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음식에 대해 먹는 자나 먹지 않는 자의 구분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문제로 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4절에서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폐하)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라고 주인과 하인에 대해 비유를 말한다. 주인이 세운 것에 대해서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인은 주인의 소관 아래 있다는 것을 통해 율법을 세우고 폐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한다. 그러기 때문에 세우고 폐하는 것에 대해 인간들이 심판한다는 것은 주인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서로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하는 월권행위이다.

이어서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5-6절)라고 날에 대한 문제까지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율법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랑으로 온전히 채우신 완성이 율법인데 그 법을 가지고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 어떤 날은 중요하고(문자적으로는 날 위의 날로 본다는 의미), 어떤 날은 중요하지 않는 그런 것은 없다. 율법에서 음식이나 날에 대한 규례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한 마디로 다 주를 위한 것이지 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라는 이탈리아 백부장에게 복음을 드러내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내용이 나온다.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행 10:11-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났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제까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음식과 날의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베드로의 모든 생각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다는 기준을 인간들이 가지고 있다. 인간 쪽에서 음식과 날의 규례를 지킨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깨끗하게 하신 것과 아닌 것의 기준이다. 그 기준이 인간의 율법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한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십자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복음이었다. 율법에서 음식과 날에 대한 문제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에 율법의 완성으로 행하신 십자가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게 만드신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를 위하여”라고 세 번씩이나 강조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주를 위해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또 방법적인 것으로 붙잡는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방법이 아니다. 관심과 중심이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이 낫다 아니다를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를 폭로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몸된 교회에 예수님의 믿음을 넘겨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면 그 믿음에 의해 주를 위하여 살게 되어 있다.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4-17)

 

 

모든 율법의 내용은 십자가로 인한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이미 율법은 완성되었다. 십자가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을 가지고 아직도 우리는 내 사랑을 줄 수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만용을 부리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신 한몸됨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에게는 무엇을 먹어도 괜찮고 어떤 날이라도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날이다. 그래서 앞의 강론에서 모든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우리는 이미 확인했었다. 어떤 특별한 날이나 절기, 안식일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주성교회는 어떤 특정한 절기를 지키지 않고 일요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매주 밋밋하고 불편한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에 그저 감사가 되는가?

율법은 하나의 건물과 같은 것이고 우리의 옷과 같은 것이다. 인간에게 율법이라는 것이 주어지니까 온갖 교리들로 다 치장을 한다. 마치 건물이 있으면 그 건물을 치장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무수한 교리들을 만들어 치장을 한 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 옷을 입으면 입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의 옷을 비교하면서 더 나은 옷을 입고 자랑하기 위해 더 좋은 옷을 계속 찾는 것처럼 율법이 구체적인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더 구체적인 것이 있어야 하고 더 자세한 율법의 조항이 있어야만 더 착해질 수 있는 것처럼 옷을 꾸민 자들이 유대인들이고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건물의 완성된 모습, 그 옷의 완전한 모습을 나타내시니 율법으로 치장하려고 했던 모든 인간의 수치가 다 드러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 언약을 인간 세계 안에 집어넣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공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 앞에서가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앞에서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 어느 인간도 율법의 한 말씀도 지킬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사실을 온 만천하에 폭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어떤 자도 안식일을 지킬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우상 숭배에 대해서 자유로운 자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마음은 이미 죄로 인해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성도에게 더 이상 행위로 지켜야 할 율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은 단순히 계명들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가 그것을 행위로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보여주는 복음이라는 사실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공개되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율법 저 너머에 초월하신 분으로 존재해 계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제 율법 저 너머에 초월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합류되어 한 몸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에 율법의 완성 안에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미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이렇게 나타내었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2022032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70.1401-06 주를 위하여(2022032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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