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71강 로마서 14:7-12 죽은 자와 산 자의 주

불편한 진리 2022. 4. 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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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일흔한 번째 강론

로마서 14:7-12

죽은 자와 산 자의 주

 

주말에 ‘태종 이방원’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그런데 사극은 그 결론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있는 이유는 결론을 풀어내는 과정에 있다. 어떤 과정을 통해 그 결과가 나왔는가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사극에서 역사의 결과를 먼저 알고 있지만 그 과정을 확인하는 것처럼 성도에게도 결과가 확정되어 있음을 알고 확정을 지으신 분 안에서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말씀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절)라고 했는데“우리”란 누구인가? 앞의 강론에서도 많이 나누었지만 단순히 이 서신을 기록한 바울 사도와 서신을 받아 보는 로마 교회 교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들의 우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1:1)고 이 서신을 받는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1:6),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1:7) 이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12:1에서도 말씀한 바와 같이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 곁에 굳게 세워진 자들이기에 말씀의 섬김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12:5)이 된 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7절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으니까 우리 중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지요? 그리고 또한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지요?’라고 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이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이후는 각자 개개인이 되었다. 이것이 죄악이다. 그래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 선악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성도에게는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14:1 이하의 말씀을 통해 본 것처럼 성도란 주인을 제쳐두고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도는 그 모든 율법의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주신 것임을 알기에 음식이나 날의 문제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상태에 있는 자이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주의 것으로 확정되어 있음을 아는 자이다.

그래서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여기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의미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견해나 행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살아 있다고 해서 달라지고 죽어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미 주의 것으로 확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확정된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을 9절에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우리 성경에 “주가 되려 하심이라”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퀴리유오’는 ‘주인이 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라는 뜻이다.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으로 다스리신다’라는 의미이다. 죽음이라는 심판과 부활을 통해 영생을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 주의 것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성도라고 선언했었다.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6-7)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된 자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은혜와 평강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평강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초월적인 능력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새로운 창조라고 선언하였고 갈라디아서에서도 동일한 말씀으로 기록하였다.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5-17)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9-20)

 

그리고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0절)라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인이 되어 다스리신다면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가능한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심판대”란 재판석이라는 뜻이다.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재판석에 앉아 다 판단한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들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심판은 하나님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발상의 전환이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으로 인해 그렇게 확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0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언급한다.

우리가 주의 것이 되기 위해 우리 생각을 바꾼 적도 없고, 주의 것이 되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오히려 알지도 못하면서 온몸으로 철저히 완강하게 거부했던 자들이다.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며 이 땅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살해한 자들이 바로 ‘나’라는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 죽음에 넘겨주셨고 또한 부활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자들이기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그 십자가에 흘리신 피를 믿게 하시고 주를 위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구원이 나의 행위와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행위로 이루어졌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가? 성도에게는 자기를 위한 구원이 없기에 그 어떤 율법이나 행위로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그리고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11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 45:23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문맥을 좀 더 넓게 생각해 보자.

 

20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 21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23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 45:20-23)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외칠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갔다. 그래서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지키고 그 언약에 의해 자기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이런 말씀을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된 교회였다. 자기를 위해서 함부로 판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형제에 대해서 율법을 가지고 매이도록 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 앞에서 온전히 복종하는 모습으로의 교회이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되었다고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밝혀준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로 고백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이용해서 천국에 가자는 의미가 아니다. 구약에서 언약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성취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성령을 받고 이렇게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강론하였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욜 2:32)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 이상 자기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상태로 만들고 오직 한 몸 예수 그리스도로 살도록 하신 은혜이다. 그리고 12절에서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러므로 한 명도 빠짐없이 각자 자기가 가진 말씀을 하나님께 넘겨줄 것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들은 오직 진리의 말씀, 영생의 말씀만 남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다시 넘겨줄 것이지만 십자가와 관계없는 자들은 자기가 받을 심판의 말씀을 하나님께 넘겨줄 수밖에 없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다운 교회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은 평가와 판단들을 한다. 그럴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교인 수가 얼마나 많은가? 혹은 전도에 얼마나 열심을 내는가? 또는 기도가 얼마나 뜨거운 교회인가? 행정 체제나 조직이 얼마나 튼튼하게 잘 되어 있는가? 재정 상태는 좋은가? 등등으로 교회 됨을 이야기하려고 하나 그것은 기업하는 사람들이 거래를 할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의 고백은 이것 밖에 없어야 한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는 바울 사도의 허무주의적인 발언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의 생애를 붙잡고 일하신 결과로 나온 고백이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확정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은 영생의 말씀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것을 먼 미래의 것만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음식을 먹는 것, 날을 구별해서 거룩하게 지키는 것 이런 것들로 자기의 믿음을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날마다 십자가 정신으로 죽고자 하는 믿음인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2022040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71.1407-12 죽은 자와 산 자의 주(202204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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