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예순일곱 번째 강론
로마서 13:1-7
위에 있는 권세
위에 있는 권세를 ‘국가’로 생각해서 국가, 정부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자신의 입장과 같은 정부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라면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애매한 기준으로 본문을 이해한다. 그래서 쿠데타로 세워진 정권이나 독재정부에도 무조건 복종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도 자기 편한 대로 이해하고 적용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어떻게 취하느냐 하는 문제로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 죄인들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사상에 맞추어 성경 말씀을 이용하고 인간을 증명하는 쪽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준은 언제나 명확하다. 로마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1:1)에 대해 말씀하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 되었는데 “믿음에서부터 믿음까지”이다(1:1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 되었기에 인간의 믿음(행위)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는 것이 “복음”이다(1:2-4).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상대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국가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본문을 가지고 우리의 태도나 삶의 자세를 말할 것이 아니라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행하셨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보여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2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국가란 곧 신앙 공동체였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로마의 다스림에서 정치적으로 독립시키는 문제는 유대인들의 신앙이었다(참고 행 1:6). 그런 연장선상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들에게 유대인들에게서나 로마 정부의 박해를 받고 있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한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당시 교인들에게 상당히 심각한 어려움이었던 것 같다.
창세기 4:17에 의하면 가인이 성을 쌓아 그 아들의 이름으로 에녹이라 칭했다. 하나님을 떠난 범죄한 인간은 최초에 자기 자신과 함께한 혈육을 지키는 성을 세우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거기에 권위적인 군주 라멕이 등장한다(창 4:19-24). 인간의 성향과 능력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죄인들에게는 그 복을 하나님의 형상에 대적하는 아담의 형상을 퍼뜨리고 다스리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죄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의지와 행동은 항상 탐심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을 가인의 후손을 통해 폭로하셨다. 가인은 죄가 자기를 점령하도록 허용했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그는 동생을 살해함으로 죄인의 의지가 어떤 모습으로 성취되고 드러나는가를 보여준다.
모든 민족의 갈래도 이와 같은 속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이 이를 증명해 준다.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탐욕은 성과 탑을 쌓는 것으로 드러날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복의 근원이 되는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염두에 두셨다. 그 국가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설립되는 나라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나라이다(창 12:1-3). 이 나라에는 갈등이나 혼란이 더 이상 있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나라 외에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언약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면 멸망 받을 나라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거부하고 가인의 후예처럼 죄로부터 오는 저주를 인간 자체적인 노력으로 방비하고 성을 쌓아서 그 안에 숨고자 하는 시도는 죄인들의 본능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실체를 통해 죄인은 죽고 약속의 자녀로 생명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다. 결국 성경에는 인간의 나라나 이 세상을 옹호하고 인정하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세상 나라가 존재하도록 만드셔서 그것을 정죄하고 고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주어진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위에 있는”(헬, 휘페레코)이라는 말은 ‘능가하다, 탁월하다’라는 뜻으로 단순히 위에 있다는 정도의 표현이 아니다. “복종하라”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로 ‘휘포탓소’인데 ‘휘포’(~아래)와 ‘탓소’(순서 있게 배열하다)의 합성어이다. 1-2절을 직역하면 ‘각각의 목숨은 탁월한 권세 아래 놓여 있다. 왜냐하면 권세는 하나님 아래 있지 않음이 없고 그 아래 있도록 잘 배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세를 대항하는 자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고 스스로 심판을 취하게 될 것이다’라는 표현이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모든 권세가 하나님 아래 있고 하나님께서 잘 배치하셨기 때문에 그 권세 아래 있지 않으려는 상태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결국 바울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권세란 단순히 세상 나라의 지도자나 직장 상사, 가정의 가장에 국한된 권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권세 위에 계신 궁극적인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19-20절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는 뜻으로 이해했었다. 그러니까 악의 머리는 악의 머리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의 심판에 맡기라는 의미인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 위에 있는 권세, 즉 악의 머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오늘 본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씀하는 바는 결코 세상의 권세를 인정하고 옹호하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차원을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세자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온전하신 뜻과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9:17에서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 9:17)라고 말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의 권세를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변이 3-4절에서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라는 말은 오해하기 쉬운 번역인데 직역을 하면 ‘그는 선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라는 말이다. “칼”이란 세상의 권세에 맡기신 일반적인 형벌 수단을 의미한다. 세상의 권세자란 일반적인 악을 저지하는 차원 정도로밖에 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악을 저지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차원에 머물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권세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탁월한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머리가 되신 권세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3-18)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머리 되심이다(마 28:1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요 성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를 구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자들이다. 여기서 “먼저”란 순서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직’이라는 의미이다. 성도에게 구하여야 하는 것은 정치의 개혁이 아니고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왕국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도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면 ‘나’라는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세상에 대해서는 삭제된 상태이기에 내가 어떻게 하면 발전하고 성장할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둘 수 없는 존재이다. 십자가 안에서는 자기 확대나 확산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5절 이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라고 하였는데 “양심”(헬, 쉬네이데시스)이란 ‘쉬네이도’(함께 보다, 이해하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즉 세상에서 함께 보는 관점에서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6-7절)라고 말씀한다. 한 마디로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버리듯이 주라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 왕국을 사는 성도에게는 세상의 것을 채우고 가진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하늘에 속한 분이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 하셔서 말씀의 성취를 위해 세상의 권세에 의해 유린당하신 것이 십자가 죽음이고 그것을 자기 목숨을 버리는 권세라고 밝히셨다.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예수님을 거부한 세상, 이 땅의 나라를 선한 나라로 바꾸어 보겠다고 주일마다 예배로 하나님께 아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퇴학시킨 권세가 세상이라는 학교의 권세와 같은 것인데 우리는 그 권세에 굴복하면서 장학금 받아 출세하려고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며 살고 있다.
이 땅의 교회나 국가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나라의 영광보다 얼마나 어설프고 무가치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도록 던져 넣으신 배경이다. 따라서 세상의 교회나 국가가 행하는 일을 보면서 그 죄악들이 내 안에 그대로 내재 되어 있음을 날마다 발견하고 십자가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는 이런 현장에서 십자가 권세에 의해 날마다 죽는 모습일 수밖에 없다. 선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미 악을 이기셨기 때문이다(2022030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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