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64강 로마서 12:3-8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불편한 진리 2022. 2. 13. 19:19

https://youtu.be/Xs8rGGWm1EY?t=204 

 

❖ 로마서 예순네 번째 강론

로마서 12:3-8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부르심을 입어 의에 합류된 거룩한 성도라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베푸신 구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인간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참하게 십자가에 살해하였다. 어느 누구도 주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실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 홀로 언약을 성취하신 일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인간의 행위가 어디에도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를 십자가로 철저히 차단하셨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신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하여 살해한 현장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들에게 의와 생명을 공급하신 구원의 자리이기에 그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 할 말이 없다는 뜻이며 동시에 모든 기준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라는 말씀은 단순히 우리 몸으로 교회에 봉사한다든지 아니면 정성을 다하여 자신을 드리는 예배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두 번의 강론을 통해 살펴보았다.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드리신 섬김에 의하여 자기 백성들을 굳게 세우시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영적 예배가 아니라 말씀의 섬김이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몸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기준으로 말씀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절)라고 한 문장으로 선언한다. 여기서 갑자기 왜 “몸”을 언급하는가? 우리는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바울 사도가 선언한 이유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 곁에 굳게 세워진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에 근거한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세우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3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8)

 

본래 원수였고 하나가 아닌 둘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이다. 2절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성도는 이 악한 세대와 같은 모양을 내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전혀 다른 형상으로 바뀌어진 존재이다. 그렇게 바뀌어진 결과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증명하는 상태이다. 이를 두고 성경이 ‘교회’라고 칭한다.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8-20)

 

그래서 3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라는 말이 들어 있다. 즉 은혜로 말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온전하신 뜻이 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의 몸 된 교회로 은혜를 받은 자의 입장이지 자기 노력으로 구원이 생겨나게 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넘겨주신 같은 은혜 안에서 같은 생각으로 서로 말하고 듣고 나눈다는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

“분량대로”(헬, 메트론)라는 말은 ‘척도, 기준’이라는 뜻이다. 즉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는 말이라기보다 ‘믿음의 기준’을 가진 상태를 의미한다. “생각을 품지 말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휘페르프로네오’인데 ‘자신을 높이 생각하다’라는 뜻이다. 즉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라는 말은 자신을 너무 높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높이 생각한다는 것은 곧 믿음의 기준을 벗어난 상태라는 의미이다.

또한 우리 성경에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소프로네오’라는 말은 ‘건전한 마음을 가지다, 정신을 차리다, 합리적이다, 온건하다, 신중하다’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를 성경 다른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하게 된 것을 정신을 차리고 건전하게 된 상태로 나타낸다(참고 막 5:15, 고후 5:13, 벧전 4:7 등). 즉 건전한 마음을 가지거나 정신이 온전하다는 것은 믿음의 기준을 가진 상태라는 의미이다.

믿음의 기준을 가진 상태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뜻이고 몸으로 비유한다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4절),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절)라고 선언한다. 내가 주님의 지체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가 된 것이다. 내 기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에서 말씀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는 말은 우리가 지혜를 가지고 각자 주어진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하여 자기 믿음이 허락하는 정도까지만 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한 마디로 믿음이 한다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는 뜻이다. 지체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이시고 몸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어떻게 하시는가?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6절 이하이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8절). “은사”(헬, 카리스마)란 한 마디로 ‘선물’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넘겨주신 선물을 7가지 대표적으로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 다스림, 긍휼’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언”(헬, 프로페테이아)이란 ‘말씀’을 의미하고, “섬기는 일”(헬, 디아코니아)이란 ‘식사의 시중을 드는 것’(눅 10:40, 행 6:1)이고, “구제”(헬, 메타디도미)란 ‘나누어주는 일’, “다스리는”(헬, 프로이스테미)이란 말은 ‘인도하다, 돌보다’라는 뜻이다. “분수대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날로기아’라는 말인데 ‘일치, 조화, 균형, 몫’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아나’(~위에)와 ‘로고스’(말, 말씀)의 합성어로 ‘위의 말씀’, 즉 하늘의 말씀에 일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즉 “믿음의 분수대로”라는 말은 믿음에 일치하는 말씀이 “예언”이라는 뜻이다.

6-8절의 말씀을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넘겨주신 은혜를 따라 저마다 다른 우수한 선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말씀에 일치해야 하고, 식사를 시중드는 일이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식사를 시중드는 일로, 가르치는 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위로하는 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로, 나누는 자는 순수하고 정직함으로, 인도하는 자는 열심으로, 불쌍히 여김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여야 한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탁월하고 우수한 선물이 우리 각자에게 다 다르게 주어지는데 말씀을 나타내는 자라면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어야 하고, 식사를 시중드는 일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양식을 주심과 같이 하여야 하며, 가르치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심과 같은 것이어야 하고, 위로하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로 하며, 주어진 은혜를 나누는 일이라면 순수하고 정직함으로 하여야 하고, 돌보고 인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해야 하고, 불쌍히 여기는 자비를 베푸는 자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데 그 하나님의 원하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의 선물로 드러나는 이 모든 일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로마서 11장에서 선언하였었고, 또한 디모데후서에서도 은혜와 행위를 대조하여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죄인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고 그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하시기 위함이다. 많은 지체들이 있을지라도 드러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몸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십자가의 영광이다. 세상의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많은 지체가 한 몸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은 친히 그분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십자가 때문에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다양한 지체의 각 부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남기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다. 이 복음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1장에서부터 11장까지에서 인간의 죄를 적나라하게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였던 것이다.

말씀이 이렇게 분명히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들은 지체들이 소중하며 그 지체들이 반드시 있어야 주의 일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은사를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은사를 받았으면 교회에 아낌없이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목사가 교회를 사유화하여 종교집단에 착취를 하는 것에 불과한 십자가의 원수이다. 실로 십자가를 가리는 일을 하는 수고비로 먹고 사는 명백한 사기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는 주와 더불어 날마다 십자가에 넘겨지는 자이다(202202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64.1203-08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202202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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