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예순다섯 번째 강론
로마서 12:9-13
거짓 없는 그 사랑
신약의 말씀도 구약의 율법과 같은 차원으로 본다면 심각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성경은 오래전의 기록으로 현재 삶의 온갖 문제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 과정에서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는 각종 규례들이 제정되었다. 그런 것이 ‘장로들의 전통’(마 15:2)이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율법을 주셨던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들도 신약 성경의 명령들을 소위 ‘새 계명’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율법적인 조항으로 본다면 말씀과 괴리된 삶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수년 전에는 컴퓨터의 바코드 666이 마귀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컴퓨터 사용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없었던 상황들을 접하면 성경이 분명하게 짚어주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난해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술과 담배, 이혼, 교회 조직, 주일성수, 십일조 문제 등, 오늘날에는 자식과 같이 여기는 반려견에 대한 문제도 대두되어 교회가 구체적인 행동 규범들을 제시해 주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이러한 문제들을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나 목사에게 맡겨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 세부 사항에 대한 규범만 지도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의 상태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율법사, 당시의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과 동일한 오해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 횡행하고 있다.
오늘 본문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보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문의 명령들은 단순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죄인들이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동으로 지켜야 할 명령들로 받아들인다면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효로 돌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제물로 세워져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존재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절)라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은사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6-8절에서 7가지의 선물로 나타낸 것을 통해 다양한 지체들이 있을지라도 오직 한 몸 예수 그리스도만 남기시는 것이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이제 9절 이하의 말씀은 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 긍휼에 초대되었다면 이제 내 몸은 없고 한 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해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거짓이 없나니”(헬, 아뉘포크리토스)라는 말은 ‘위선적이지 않다’라는 뜻인데 ‘휘포크리노마이’에서 온 말로 누가복음 2:20에서 “의인인 척”한다는 표현이고 마태복음 6:2,5,16 등에서 “외식”으로 번역된 말이다. 직역하면 ‘위선적이지 않은 그 사랑!’인데 헬라어 성경에서는 이것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9절 후반에서 13절까지 한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니까 ‘거짓 없는 그 사랑’이 13절까지를 이끌고 있는 형식이다. 다시 말해서 9b-13절의 내용은 수단이나 혹은 방법에 대한 문제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양한 선물로 나타날지라도 사랑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사랑”(헬, 호 아가페)은 단순히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에서 말한 사랑을 지칭하고 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이기적인 우리의 사랑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자에게 입혀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근거해서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성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5:5,8, 8:39)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8:35)이다. 그러므로 9절 이하에서 말씀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한다는 뜻이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라고 하였는데 “악”(헬, 포네로스)이 무엇이며 “선”(헬, 아가도스)이 무엇인가? ‘악’이란 선과 대조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선’이란 단순히 착함이나 우리가 알고 행하는 선이 아니라 ‘그 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땅에 누구도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성경은 단언한다(3:12).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그래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참고 시 100:5, 118:1, 나 1:7). 바울 사도가 고백하였듯이 선이 없고 선을 행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 자체가 악이다. 선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기에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지 않은 상태가 악이고 죄이다. 이런 점에서 ‘악’이란 선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개념이다. “미워하고”(헬, 아포스튀게오)라는 말은 ‘싫어하다, 혐오하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악을 혐오하여 선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속하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콜라오’인데 ‘콜라’(아교, 접착제)에서 유래한 단어로 ‘결합하다, 집착하다, 부착하다’라는 뜻이 있다(같은 단어를 고린도전서 6:17에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라고 번역하였다). 이 말은 명령형이지만 수동태로 되어 있다. 우리말로 ‘결합 되어져라’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선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되어진 상태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다음 구절인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0절)라는 말씀에서 “형제를 사랑하여”(헬, 필라델피아)를 단순히 혈육의 형제를 사랑하고 우애해야 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관계의 사랑을 묘사한 것이다. “존경”(헬, 티메)이란 ‘가치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서로 존경하면서 높여 주라를 말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상태가 바로 한 몸인 교회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1절)라는 말씀 또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항이 아니다. “열심을 품고”(헬, 호 프뉴마 제오)라는 말을 직역하면 ‘타오르는 그 영으로’, 혹은 ‘뜨거운 그 영으로’라는 말이고 “섬기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듈류오’인데 ‘종’에서 유래된 단어로 ‘종이 되다, 예속되다’라는 뜻이다. 쉽게 정리하자면 ‘성령의 끓어오르는 열심에 의해 주께 속하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환언하면 우리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는 열심으로 주를 섬기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불타오르는 것과 같은 상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에 속해 있도록 만드신다는 뜻이다. 그것을 거짓 없는 사랑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12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좀 풀어서 말하자면 ‘소망 안에서 혹은 소망으로 즐거워하고, 환난 안에서 혹은 환난으로 인내하고, 기도 안에서 혹은 기도로 계속 머무르고 있으라’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미 앞에서 선언한 내용을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4-26)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바울 사도는 이렇게 앞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 있음을 밝혔다. 성도들을 환난을 즐기게 만들고 환난은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도록 만드시며 소망을 이루어내는 근거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이미 선언했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도에 힘쓰기를 노력하여 실천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기도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의미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백성들을 소망 안에서 소망으로 즐거워하게 만들고, 환난 안에서 환난으로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도록 만들며, 기도로 기도 안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만드신다는 뜻이다. 기도란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내 안에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기도 안에 계속 머물러 있게 만드시는 것이 십자가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3절)라는 말씀에서 “쓸 것”(헬, 크레이아)이라고 하였는데 ‘필요, 부족’을 의미하는 말이다. “공급하며”라는 말의 헬라어 ‘코이노네오’는 ‘참여하다, 나누어 주다’라는 뜻인데 ‘코오노노스’(참여자, 동반자)에서 유래한 단어로 ‘어떤 사람과 함께(그가 가진 어떤 것에) 참여한다’ 혹은 ‘어떤 사람과 함께(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부족한 어떤 것을) 나눈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거룩하게 된 자들의 부족함에 함께 참여하여 나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근거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그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게 된 자들의 부족함에 함께 참여하여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한다는 것이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하니까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상대를 대접 잘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했었다. “손 대접”(헬, ‘필록세니아’)이라는 말은 ‘낯선 사람(나그네)에 대한 사랑, 환대’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힘쓰라”(헬, 디오코)라는 말은 ‘뒤좇다, 추구하다’라는 뜻이다. 직역을 하면 ‘나그네 환대를 추구하라’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그네를 두신 이유는 하늘에서 나그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위선적이지 않은 그 사랑은 사랑의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이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거룩하게 된 자들, 즉 성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말씀과 같이 우리 각 개인이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 백성들을 반드시 이렇게 만드시고 되게 하시는 것이 교회라는 의미이다.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은 마음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진 바 되었다면 이제 내 몸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된 상태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된 상태라는 것은 자기 사랑을 가지고 사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에 나타내시고 확증하신 그 사랑에 함몰된 상태이다.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요 성도라고 한다. 주성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모습인가?(2022022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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