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51강 로마서 9:30-33 걸림돌

불편한 진리 2020. 11. 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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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쉰한 번째 강론

로마서 9:30-33

걸림돌

이사야 5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은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뜻이다.

죄인의 습성은 항상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수준을 낮추어서 생각한다는 말이라기보다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하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앙이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지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일 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는 마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언약)을 말씀으로 계시하신 책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일지라도 그 내용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우리의 관점에서 이해해서도 안 되고 우리의 사정에 맞게 적용해서도 안 된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는 인간이 자신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고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한에 대해 인간은 할 말이 없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토기장이와 그릇에 대한 비유로 하나님은 그릇을 만드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파기하실 수도 있는 분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성경에서 남은 자란 단순히 남았으니까 남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약속의 씨,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결국 약속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녀이고 음란한 여자와 같은 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자를 불러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성도가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계획하신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까지 말한 것에 대한 작은 결론을 짓기 위해 “그런즉”(헬, 운;then;그러므로, 그러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30-31절)라고 선언한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고,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씀한다. 본래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을 좇아 열심히 살았던 이스라엘에게는 의가 주어지지 않았고 도리어 의를 좇지도 않고 하나님의 의를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이방인에게 의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전혀 의를 좇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원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는 의가 주어졌는데 그것을 가지고 “믿음에서 난 의”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믿음에서 난 의”라는 것은 “내가 믿었다! 그래서 나는 의를 받았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원하고 구해서 얻는 인간의 행위를 말하지 않고 우리가 전혀 원하지도 않았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의가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았으나 법에 이르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율법 자체는 의로운 것이다. 그래서 의의 법을 좇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문제이다. 이스라엘이 문제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법을 늘 자기 의로 만들고자 하고 자기 위주로 이용하고자 하는 죄인의 문제라는 말이다. 죄의 권세가 우리를 항상 그쪽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이 아무리 법을 좇아가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법에 완전한 모습으로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시니까 인간은 그것을 못 지킨다는 한계를 보지 못하고 어찌하든지 행위로 만들어내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수준에 도달하려고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고 그래서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 갖은 노력과 힘을 다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셔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보자면 그저 한탄할 수밖에 없지만, 문자 이면에 언약의 관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법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 언약의 말씀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 인간은 이렇게 행위에 의지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문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 완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자기 행위를 가지고 계속 하나님께 나아가며 법을 이루어내려고 하는 자는 걸림돌에 의해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32절)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의지하지 않고”, “의지함”이란 말은 의역한 표현이고 헬라어로 ‘에크’(~에서, ~으로부터, ~ 때문에)라는 말인데 발단이나 근거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다(그래서 새번역성경에는 “근거하여”라고 번역하였다).

 

이스라엘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근거하고 있었기에 믿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구약에서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라고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3절)라고 하였다.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는 같은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을 보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14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 8:14-15)

 

바울 사도는 이사야 선지자의 이 두 구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걸림돌을 두셨고 이스라엘이 거기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걸림돌”이란 무엇인가?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과 농부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 21:42-44)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눈에는 그저 쓸모없어 버리는 돌(히, 에벤)로 보이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아들(히, 벤)로 오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자신들이 원하는 집을 짓기 위하여 스스로 건축자가 되어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기어코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에 의해 건축을 이루어내시는 분이다. 그래서 모퉁잇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함께 돌이 되는 구원이 이루어지지만, 이 복에 참여되지 않는다면 그 돌이 떨어지는 심판에 의해 흩어짐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퉁잇돌 위에 떨어진 그들만 산 자이며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지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서지고 깨어진 자들이 산 돌이신 예수님과 연결하여 새로운 성전으로 지어지는 성도이며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림돌이나 거치는 바위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이다. 베드로 사도는 로마서 본문과 같이 아주 정확하게 이 내용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4-10)

 

언제나 인간의 행위가 걸림돌이다. 인간의 행위로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걸림돌이 된다. 유대인들은 바로 자기들의 행위로 인해 예수님을 살해했다. 의의 법을 좇아갔기 때문에 자신을 믿음으로 나타내신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율법적 행위의 끝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다. 베드로 사도의 표현대로 이스라엘은 넘어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가능하면 걸림돌을 제거하려고 한다. 십자가라는 것이 혐오스럽고 사람들에게 별로 매력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 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교회 나오는 데 거부감이 들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모임이 아니라 걸림돌을 놓는 모임이다. 교인들이 교회에 찾아 나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면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제거할 용의가 있다. 마치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걸림돌을 제거해 주는 선한 목자로 존재하는 것 같다.

 

더러운 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헌금이라고 강요하면서 거두어 바벨탑과 같은 높은 종탑을 세워 그 꼭대기에 십자가는 걸어 놓았지만 정작 교회 안에는 십자가를 제거하고 있다. 복음의 본질을 될 수 있는 한 가리면서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는 듯이 십자가 종탑을 한 개로 모자라 두 개씩이나 만들어 교회 성장이 하나님의 축복인 양 과시하며 속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부름을 받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십자가의 걸림돌에 안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넘어졌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 걸려 넘어졌는데 다시 일어난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은혜이고 다시 일어나게 하신 것도 은혜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걸림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넘어져도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거기서 흘리신 피가 영생을 이루시는 일에 필요한 것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자가 성도이다(2020.11.08_강론/김영대).✞

 

롬51.0930-33 걸림돌(2020110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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