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쉰 번째 강론
로마서 9:25-29
남은 자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삶이 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대부분 교인들은 내가 하는 어떤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되는가를 생각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성경적으로 합당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올바른 행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삶의 모든 것이 성경적인가를 점검하기 위해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성경을 볼 수 있고 말씀이 이해된다는 관점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성경을 보는 것이고 열심히 읽고 공부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공부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았을 때나 성경공부를 좀 소홀히 하였다면 그만큼 하나님께 불충성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성도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삶이 될 수 없다는 의미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도록 주장하신다는 뜻이다. 즉 신앙생활이란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죄악 된 것이라고 폭로하고 공격하신다는 뜻이다(요 16:7-8). 말씀 자체의 활동력이 나의 마음과 뜻을 판단하여 하나님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상태로 해체하기 때문이다(히 4:12-13). 이것을 갈라디아서 2:20의 표현대로 하자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십자가에 죽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뜻이다.
디모데후서 3:15-17에 보면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잘 사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이제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는 입장으로 볼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확인하는 것이다.
앞의 강론에서 우리는 “토기장이와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대한 문제를 생각했었다. 그릇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뜻에서 비유를 한 것이었다. 우리가 깨끗한 그릇이 되자든지 그릇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서 많이 채워주시니까 큰 그릇이 되자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이 그릇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분이셨기에 또한 그릇을 마음대로 파기하실 수 있는 분임을 확인했었다. 그러므로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이나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런데 그릇은 유대인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름을 받은 자이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인가 유대인인가 하는 민족적인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말씀한다.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존재는 긍휼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 못한 존재는 진노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이고 그 부름을 받은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시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 자신의 약속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율법서에서 에서와 야곱을 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으로 말하였고, 모세와 바로를 들어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말하였다면 이제 선지서를 인용하여 그 근거를 제시한다. 먼저 호세아서의 내용을 가지고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25-26절)라고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야 하는데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취하여 자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딸을 낳아 “로루하마”라고 하였다. 세 번째 낳은 아들에게는 “로암미”라고 이름 붙였다. “이스르엘”이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라는 뜻이고,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로암미”라는 이름은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서 다시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는 자들이 있었다. 아직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이 파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2장에서 이렇게 외쳤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 2:23)
이 말씀은 바로 호세아 선지자가 고멜을 취하여 자식을 낳는 그 모든 과정을 통틀어서 정리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자식을 낳게 하고 그 자녀들에게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이름 붙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로 취해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구원의 방식이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구원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기존의 것을 적당하게 수리해서 쓰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것을 인정해 놓고 그 위에 하나님의 구원이 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것은 모조리 부정하신다. 그리고 철저히 무너뜨리신다. 완전히 초토화하고 그 다음에 자기 백성들을 새롭게 만들어서 세우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새롭게 태어나서 하나님의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서 이루어진 구원이란 가짜이다. 나의 육체의 모든 소욕이 죽는 것으로 주님의 십자가가 드러난다. 여기에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두 십자가에 죽여서 새롭게 살려낸 자들과 상대하시며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선언하였다.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27-28절). 이 말씀은 이사야 10:22을 인용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뜻을 좀 더 폭넓게 보자.
20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 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사 10:20-23)
선지자를 통하여 분명히 밝혀지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뜻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남은 자를 향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남은 자”란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사야 1:9을 인용하면서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9절)라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 이사야 1: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 1:9)
우리 성경에 “생존자”라고 번역하였는데 ‘남은 자’라는 말이고 이 말을 바울 사도는 “씨”로 표현하였다. 즉 “남은 자”를 “씨”로 이해하고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실 때 이미 하신 말씀이었다.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2-13)
즉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남은 자를 두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남은 자가 그루터기이고 그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라는 것이다. 거룩한 씨란 바로 언약의 후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비유를 통해 자신을 씨 뿌리는 자로 나타내셨는데 이 말씀은 곧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그것이 자신이 씨가 되어 뿌리는 것임을 나타내셨다(마 13:1-9).
결국 하나님은 자기 씨, 즉 남은 자를 두시는 방식으로 언약을 성취하셨다. 호세아 선지서를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향해 내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고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남은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의 성취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우리가 창녀이고 음란한 여자이며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이다.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성도란 거기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니까 지옥가야 할 존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건져내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이고 은혜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은 남은 자, 거룩한 후손(씨)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이기에 이제 나에 대해 말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자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남은 자를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에 품고)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이라고 하였다(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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