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쉰두 번째 강론
로마서 10:1-8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
우리 인간의 삶이란 일생동안 끊임없이 무엇인가 행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강하게 집착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은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이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행위에 대한 문제로 결론 내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 생활 전반에 깔려 있다. 아니 우리의 모든 삶이 자기 행위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수 믿는다면 믿는 행위를 나타내야 하는 것이 믿음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서 그런 생각이 나오는 것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믿음에 대한 것도 그 원인이나 근거를 자기 행위, 즉 자기 믿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한다. 그럴 때 믿음이란 사실 우리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란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와는 대조된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타나는 행위는 죄악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앞의 강론에서 의의 율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와 상관없는 모습이 되었고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인해 걸림돌에 넘어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율법을 넣어주시니까 이스라엘은 율법이 가리키는 메시아를 보지 못하고 자기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모든 인간들의 율법에 대한 반응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반응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하셨다.
결국 십자가라는 걸림돌에 넘어지는 것이 죄의 권세 아래 매인 인간들의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취하는 것이 결코 죄인들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믿음에서 난 의와 행위에서 난 의를 대조해서 말씀하였다.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걸려 넘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십자가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9장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한 것에 대한 증거를 바울 사도는 더 구체적으로 확대하여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왜 행위에서 난 의가 아닌 믿음에서 난 의만 용납되는가를 더 자세하게 선포한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1절)라고 먼저 밝힌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그것이 아니다. 여기 “원하는 바”(헬, 유도키아)라는 말은 ‘즐거움’, ‘기쁨’, ‘호의’, ‘은총’이라는 뜻이다. 즉 바울 자신의 기쁨, 즐거움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으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대조하여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절)라고 단언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으나 그 열심은 바른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올바른 지식”이란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인데 ‘지식’(그노시스)이란 말에 ‘에피’(~에 대해서, ~을 향하여)라는 전치사를 붙여 강조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을 향한 바른 지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열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요 7:19)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하셨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알지 못하는 ‘그들’이고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지 않은 ‘그들’이라고 선언하셨다.
바울이 이렇게 단호하게 “내가 증언하노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열심에 대해서 말하자면 누구보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2:3에 보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증언한다.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4-9)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행한 과거 자신의 열심은 그저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박해함으로 도리어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졌던 율법에서 난 의는 배설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인간의 자기 의는 하나님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힘써서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것이다.
‘세운다’는 말은 헬라어로 ‘히스테미’인데 이 말에서 ‘십자가’(헬, 스타우로스 : 기둥, 막대기)라는 말이 왔다. 즉 인간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열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십자가로 세우셨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신 언약의 기둥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절)라고 선언한다. “마침”(헬, 텔로스)이란 말은 ‘끝’, ‘결론’, ‘종결’, ‘목표’, ‘목적’이라는 뜻이다. 즉 율법의 목표나 목적, 결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한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여기서 율법에서 증거하고 있는 내용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아는 의를 대조하여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5-7절)라고 앞에서 말한 인간의 자기 의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이고,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밝힌다.
이 말씀은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레위기 18:5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율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율법의 취지를 율법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죄 가운데서 율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의도하신 바는 율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신 율법의 마침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율법의 완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리고 그 다음 본문 6-7절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모세의 율법으로 기록 된 것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말하는 것의 대조로 설명한 것이다. 구약을 인용한 부분이니 인용된 신명기의 말씀을 가지고 확인해 보자.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신 30:11-13)
오늘 본문에는 “하늘”과 “무저갱”이라고 되어 있고 신명기에서는 “하늘”과 “바다”라고 표현하였지만 내용상 차이는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즉 무엇을 깨닫기 위하여 하늘에까지 올라가서 그 뜻을 알아야 하고 바다 건너가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진리를 알기 위해 하늘에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바다 건너, 즉 바다 속 깊숙이 내려가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죄인이 하늘에까지 올라가서 진리를 터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끌어 내리려는 것이고 바다 속 깊숙이 내려가서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무저갱에서 그리스도를 끌어 올리려고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위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끝없이 행하는 인간의 행위가 하늘을 향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 내리는 것이 되고 무저갱으로 향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내려는 시도라는 뜻이다. 즉 죄인이 자기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방향과는 다른 것이고 그것은 곧 십자가를 대적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절)라고 하여 결국 말씀은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마음에 있는 말씀이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의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 열심이 하늘에까지나 무저갱에까지라도 가서 자기 열심을 나타내고 그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18-21)
오늘도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자에게 하늘의 영광을 입히시는 은혜를 인정하는가?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성도란 나의 행위라는 자기 의를 날마다 부인하며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행위에 주와 함께 날마다 죽는 죽음을 인정하는 자이다(강론/김영대).✞
'●──── 신약강론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4강 로마서 10:16-21 믿음과 들음과 말씀 (0) | 2021.11.28 |
---|---|
제53강 로마서 10:9-15 주의 이름 (0) | 2020.11.22 |
제51강 로마서 9:30-33 걸림돌 (0) | 2020.11.08 |
제50강 로마서 9:25-29 남은 자 (0) | 2020.11.01 |
제49강 로마서 9:19-24 토기장이와 그릇 (0) | 2020.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