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쉰세 번째 강론
로마서 10:9-15
주의 이름
“하나님의 복음”이란 죄인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 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바울 사도는 8장에서 천명했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해 낼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으로 이루신 구원이다. 그렇다면 율법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9:6)라고 선언하였다. 즉 이스라엘이라고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변경되거나 폐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택을 말했고 그 선택의 권한을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로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자, 즉 남은 자요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구원을 설명했다. 그리고 9장 끝에서 “율법에서 난 의”와 “믿음에서 난 의”를 대조하여 이스라엘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였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나 모든 인간의 자기 의란 율법적인 자기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의란 십자가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라고 밝혔다.
그리고 본문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9-10절)라고 뜬금없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흔히들 이 말씀을 가지고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과연 이 말씀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날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공식적인 신앙고백은 사도신경이다. 예배 순서에 넣어서 꼭 이 고백을 해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또한 이 신앙고백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으로 강조하면서 물세례를 받을 때 반드시 입으로 고백을 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그렇다면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앞의 강론에서 살펴보았던 문맥을 다시 정리해 볼 필요성이 있다. 10:8에 보면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라고 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의 행위로 하늘을 두루 다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무저갱까지 내려 가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여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중요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입에 그리고 마음에 이미 말씀을 주셨다는 뜻이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분리할 수 있는가? 물론 인간은 자기가 믿지 않는 바를 입으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사람의 속마음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이것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자신의 신앙에 대한 고백을 입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언어장애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는 이르러도 입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 다른 것인가?
성경에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닌 같은 뜻이다. 이런 점에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분리하여 믿는 바를 반드시 입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더욱이 본문에서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이 수동태로 인간 편에서 무엇을 행한 결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시인”이란 헬라어로 ‘호몰로게오’(고백하다, 시인하다, 약속하다, 선언하다, 찬미하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같다’, ‘동일하다’라는 말의 ‘호무(호모스)’와 ‘말’, ‘말씀’이라는 ‘로고스’의 합성어이다. 즉 ‘시인하다’라는 말은 ‘같은 말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같은 주로 말한다는 뜻이고 곧 같은 진리의 말씀을 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마음에 믿는 바를 입으로 말하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이나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주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의해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된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진리의 말씀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씀은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 즉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어떻게 구원으로 이끄시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성령께서 믿음의 말씀을 우리 입술에 두시고 마음에 새기게 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1-13절)라고 말씀한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선악의 나무를 취한 죄인이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렸던 것과는 반대로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주의 이름”이란 무엇인가? 이 말씀은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요엘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사도행전 2:14이하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이라고 말할 때에 베드로 사도가 요엘서 2:28-32의 말씀을 인용하여 강론하면서 사도행전 2:21에서 “누구든지 주으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바울 사도와 똑같이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엘서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였는데 베드로는 “여호와”를 “주”로 슬쩍 바꾸어 놓고 있다.
물론 유대인들은 구약의 여호와를 함부로 부르지 못하여 ‘주’(아도나이)라고 불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베드로의 강론 끝에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라고 말한 것을 보면 단순히 여호와를 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기 때문에 주로 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나타내신 그분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고 자기 백성들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엘서의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주어지고 있는가? 한 마디로 요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말씀이다. 즉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남기시고 그 남은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로마서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자.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을 때 그 의미는 단순히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심판 중에 남기셔서 주의 이름을 기필코 부르게 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더러 주의 이름을 부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 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하였다. 물질적인 부요가 아니라 생명의 풍성함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주의 이름을 불렀다면 차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다. 이 언약은 이미 구약에서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말씀을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두실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렘 31:31-34, 겔 36:26-28). 사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할 말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새 언약은 더 이상 율법으로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 마음에 말씀을 새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초에 율법의 외형적인 기준을 가지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어떤 예배 형태나 제도 혹은 전통 등의 종교적인 모습 안에서 찾도록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의 말씀”을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 입술에 두셨고 또한 마음에 두셨다.
이런 점에서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4-15절)라고 말씀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시지않았으면 주님의 이름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부를 자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함부로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도나 선교가 우리의 사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뜻인가를 바울 사도가 인용한 이사야서의 말씀을 직접 보면서 확인해 보자.
6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사 52:6-8)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시니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름을 더럽히지만 하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신 좋은 소식, 즉 복음을 나타내신대로 시온으로 돌아오실 것인데 그 찾아오시는 발이 아름답게(어울리며 정당한 것으로) 보일 것이라는 의미이다. 심판 가운데서 유다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시는 메시아 예언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란 말씀에서 “아름답도다”(헬, 호라이오스)란 말은 ‘적절한 때나 시기’를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때에 친히 이 땅에 찾아오심으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문맥의 흐름을 살펴본 대로 본문은 전도나 선교를 장려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미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전파”(헬, 케륏소)란 ‘선포한다’는 말이다. 즉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말씀한 것처럼 복음은 보내심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로 선포되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하였는데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졌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성도란 믿음의 말씀을 그 입과 마음에 두신 자이기에 우리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된 것이고 우리의 입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말하게 된 자이다(20201122_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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