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49강 로마서 9:19-24 토기장이와 그릇

불편한 진리 2020. 10. 1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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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마흔아홉 번째 강론

 

로마서 9:19-24

토기장이와 그릇

 

대부분 교인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 믿는데, 문제는 좋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다. 선악과를 취한 인간은 선악의 기준이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나의 기도에 무조건 응답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를 위해 사랑을 베푸시는 좋으신 하나님으로 믿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막연하게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이다.

 

이제까지 자기 자신의 하나님을 섬겨왔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다. 성경에 계시가 된 하나님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하나님이다. 십자가의 하나님이란 자기 죽음으로 이루어내신 것이기에 죄인들과 죄인들의 것을 철저히 부정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죄인들이 무엇을 원하든지 그대로 인정해주고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적을 철저히 맞서고 급기야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이다.

 

로마서는 8장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절정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구도 분리해 낼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나’라는 개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의 몸 된 교회’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상고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된 것인가? 그 문제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9장에 들어와서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몇 가지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풀어나가고 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스라엘이 실패하였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끊어지고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인가? 성경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여지지 않았다. 실패한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요 혈통적인 이스라엘 민족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합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구원의 근거가 되게 하셨다. 비록 이스라엘은 거부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따라 약속의 자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기에 이스라엘의 실패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약속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참 이스라엘이시고 또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약속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약속의 후손을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선택하셨고 또한 어떤 행위가 있기 전에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와 바로를 선택하셨는데 모세를 통해 약속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기로 하셨다면 바로의 완악함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인데 이는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다면 그에게는 책임이 없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 있다. 그래서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19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네가”란 가상의 논쟁 상대자이지만 실제 이스라엘이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여 말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인간이 반박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에 반박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래서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20절)라고 하면서 왜 반박할 수 없는지 지은 자와 지음을 받은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이 사람아!”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대조하여 한탄하는 표현이다. 지금 개정성경에서 “반문하느냐”라고 하였는데 과거 개역한글판에서는 “힐문하느냐”라고 번역하였다. 이 말은 ‘트집을 잡아 따져 묻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따져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트집을 잡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아담이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이후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며 왜 여자를 만들었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는 것과 같은 입장이다. 그것이 바로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선택하신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선택에 불만을 품은 죄인의 본 모습이다. 하나님의 선택에 따져 묻는 것 자체가 죄로 인해 나오는 질문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구약에서 나온 토기장이의 비유로 증언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절)라고 반문한다. 이 말씀은 그릇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 사도는 인간이 어떠한가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로 분명히 성취시키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약속의 아들들을 두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기 약속에 의한 선택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인간을 질그릇으로 비유하면서 심판을 말하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주요 사상 중의 한 가지였다. 그중에서 예레미야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토기장이가 일하는 곳으로 보내어 그 하는 일을 보게 하셨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 것은 토기장이가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깨뜨리고 얼마든지 다른 그릇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도 토기장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였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 29:16)

 

여기서 ‘빚는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예체르’인데 ‘목적’이나 ‘의도’와 관련된 말로써 ‘에체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창세기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할 때 ‘지으시고’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에체르’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어떤 목적과 의도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같이 심판하실 수 있는 분으로 말씀하였다(사 41:25).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인간을 진흙이라고 선포한다. 이러한 구약을 배경으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토기장이로서 모든 그릇을 다 깨뜨리고 진흙을 밟으신다고 할지라도 토기장이와 같으신 하나님께 힐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한 그릇과 귀한 그릇에 우리의 관심을 빼앗겨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그릇이 되도록 자기를 철저히 정결케 하고 준비하자고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릇을 잘 닦아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자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준비한 대로 써주어야 하는 허수아비와 같은 하나님에 불과하다. 성경은 지금 그런 무기력한 하나님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귀하게 쓰는 그릇으로 만드는 것이나 천하게 쓰는 그릇으로 만드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 편에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 중에 천한 인간이 있고 귀한 인간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뜻에 따라 그렇게 하실 권한이 있으시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22-23절에서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씀한다. 한편으로는 멸하기로 하신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것으로 자기 영광을 드러내시며 또 한편으로는 “긍휼의 그릇”으로 영광의 풍성함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이든 긍휼의 그릇을 통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바울 사도는 그릇에 대해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4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란 유대인 중에서나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심을 받은 자를 말한다.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은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되어 오직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기 때문이다(요 17:1-5).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따라 세상에 세우신 십자가를 기준으로 일하신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를 기준으로 해서 일하신다면 나와 다른 사람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 하나님께서 내 편만 드신다고만 볼 수 없고 나보다 상대가 더 많이 기도한다면 그 상대에 의해 나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 기준인 약속, 자기 기준인 십자가에 비추어 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께서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셨다는 의미는 그 그릇에 보배를 넣어 주신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릇을 보배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질그릇에 보배를 넣어 주셨기 때문에 긍휼의 그릇이 된 것이다. 그릇을 보석이 되도록 바꾸어 주시지 않고 질그릇을 질그릇 그대로 두신 상태에서 보배를 넣어 주신 것은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다. 질그릇을 부수고 깨뜨려 십자가가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십자가만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고전 1:18). 세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한 것처럼 질그릇이 깨어지고 망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드러나게 될 것이다(20201018_강론/김영대).✞

 

롬49.0919-24 토기장이와 그릇(202010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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