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스물네 번째 강론
로마서 4:10-17
믿음으로 된 의
종교와 복음의 가장 큰 차이는 인간 편에서 찾아가는 하나님이냐 아니면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신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는 것인데 성경이 나타내고 있는 복음은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신 것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주신 것이 복음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복음도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찾아오신 사건이 십자가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자고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 중에서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오해 중의 하나가 신앙의 원인과 결과를 내 쪽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구원의 확신이라도 가져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분명해 진다고 한다. 흔히 구원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50%, 우리의 행위가 50%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100%, 우리가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 100%라고 말한다. 이론상으로 마치 복음을 설명하는 말 같지만 얼마나 우리 인간 쪽의 행위를 집어넣고 싶었으면 이런 계산까지 생긴 것일까?
부자 청년을 만나신 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3-26). 이 말씀을 누가복음에 보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9:27)라고 하였다.
인간은 원인과 결과가 맞지 않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죄성 때문에 그렇다. 억지로라도 끼워맞추어 그 근거가 분명하여 내 쪽에서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어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죄인들이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이성적인 동의에 불과한 것이다. 내 쪽에서 무엇인가 분명하게 붙잡히는 것이 없다면 불안하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들은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려고 복음을 인간 편에서 확인하고 붙잡을 수 있는 것으로 왜곡하고 변질시키고 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 “다 이루었다!”(요 19:30)라는 선언이 십자가 사건의 핵심이다. 영생을 이루시는 일이 하나님 편에서 전적으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낯설고 죄인인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이 복음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복음의 진수를 아주 정확하고 분명하게 선포한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증명하였다. 그래서 9절에서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10절 이하에서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10-12절)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가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동일하게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동일하게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인데 이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이었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할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확인하는 증표에 불과한 것이기에 아브라함은 할례자와 무할례자 모두의 조상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아브라함이 실제 유대인들의 조상도 되고 이방인들의 조상도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이방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여 부르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도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를 이방인과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언약의 표시였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아브라함을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지 않았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언약을 주셨고 믿음으로 이끄셨다. 그리고 한참 후에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하게 하셨기 때문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아브라함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의롭다고 여겨졌기에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13-15절)라고 선언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이렇게 선포하였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17-2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땅과 후손(씨), 복에 대한 것이었다(창 12:1-3). 땅에 대해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었고(창 12:7, 13:14-15, 17:8), 후손에 대해서는 이삭을 주시겠다는 것으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이었으며(창 13:16, 15:5, 22:16-18), 그리고 아브라함이 복이기에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창 12:3, 18:18). 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유대인들만의 조상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 13절에서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세상이다. “상속자”(헬, 클레로노모스)란 ‘제비뽑기’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로 분배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취로 가나안 땅을 주시며 약속된 기업을 이스라엘이 상속받는 것(수 13-21장)에 근거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기업을 받는 것은 율법에 속한 자에게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자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아 하나님의 기업의 상속자가 된 것과 같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주어진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그러면서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면 믿음은 헛 것이며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파기되었느니라”(헬, 카탈게오)란 ‘파괴되다’, ‘쓸모 없게 되다’, ‘소멸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곳에는 율법을 범하는 일도 없기에 율법으로 제대로 행하였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이 율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율법을 지킨 보상이 아니라 은혜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여기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작은 결론을 짓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16-17절).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란 표현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3:26에서 “예수 믿는 자”(예수의 믿음에 속한 자)라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 즉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은혜로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았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이고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속한 자라는 의미이다.
17절 말씀은 창세기 17:5 말씀의 인용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말씀을 좀 폭넓게 보자.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4-7)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아직 이삭을 낳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약속의 말씀인데 이미 실현된 것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이 약속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분으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그렇게 이루실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브라함은 늙고 불임녀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진 상태였지만 믿음을 주셔서 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은 유효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어떻게 이루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육에 대한 모든 것을 끊어 놓고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다. 그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으니 믿으라’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 땅에 찾아오셔서 없음을 있음으로 만드신 분이다. 결국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안에 아브라함이 존재하도록 이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다는 것은 없음의 존재에서 있음의 존재로 바꾸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이렇게 선포하였다.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5-9)
(http://cafe.daum.net/joosung 강론/김영대).✞
롬24.0410-17 믿음으로 된 의(20191020).pdf
'●──── 신약강론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6강 로마서 5:1-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0) | 2019.11.03 |
---|---|
제25강 로마서 4:18-25 약속과 믿음 (0) | 2019.10.28 |
제23강 로마서 4"4-9 다윗이 말한 복 (0) | 2019.10.07 |
제22강 로마서 4:1-3 아브라함의 믿음 (0) | 2019.09.30 |
제21강 로마서 3:27-31 율법의 행위와 믿음 (0) | 2019.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