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스물여섯 번째 강론
로마서 5:1-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베풀어진 복음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로마서 처음부터 밝히고 있다. 복음의 출처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음을 분명하게 나타내시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존재라고 폭로하였다. 그래서 3:21에 와서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선언한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란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바울 사도는 계속 강조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는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이렇게 나타내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를 의롭게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조차도 우리의 믿음에 맡겨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어 증명하였다. 즉 아브라함과 다윗은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먼저 약속을 주신 것에 근거한다고 밝혔다.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라면 이제 성도가 누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울 사도는 5장에서 계속 설명하는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1절). “그러므로”라고 한 것을 폭넓게 보자면 이제까지 말한 1-4장까지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고, 좁게 보자면 3:21 이하에서부터 4장에서 말한 것에 대한 작은 결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성경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성경에 기록된대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화평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의로움을 입은 결과가 하나님과의 화평이라는 뜻이다. “화평”(헬, 에이레네)이란 우리 성경에 ‘평화’, ‘평강’, ‘평안’, ‘화목’이라고 번역되는데 ‘에이로’(연결하다)에서 온 말이다. 연결한다는 것은 끊어져 있고 분리되어 있고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죄인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고 나누어져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진 배경, 전제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8 이하에서부터 3:20에 이르기까지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적나라하게 폭로했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한 인간은 누구든 예외 없이 뱀의 후손이 되어 하나님을 원수로 삼고 있는 자이다. 즉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이다. 단순히 하나님을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면 죽이고 싶어하는 상태에 있는 원수이다. 하나님과의 원수 관계에 있던 자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쪽에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화평의 관계를 만드신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바울은 로마서 다음 본문에서 밝히고 있고 또한 에베소서에서도 이렇게 자세하게 선포하였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8)
그래서 2절에서 그 원인을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밝혀주고 있다. “들어감을 얻었으며”(헬, 프로사고게)라는 말은 ‘가까이 갔다’, ‘접근이 허용되었다’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를 에베소서 2:18과 3:12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었다”라고 표현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이나 성전 뜰에만 들어갈 수 있었고 성소에는 제사장만,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이 보여주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 하나님 나라에 접근이 제사장에게만 허용될 수 있었고 그 뜰에서 동물을 잡아 피를 뿌려야 했던 것은 대속의 죽음을 이루실 한 인격체를 계시해 주시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심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져 그 길이 열린 것이라고 신약에서 밝혀주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막아 놓으셨던 에덴 동산의 동쪽 길을 여신 것이었다. 마태복음 27:51에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23:45에서는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라고 하였던 것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아브라함 언약에서 동물을 쪼개어 놓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언약을 어기는 자는 쪼개진 동물과 같이 될 것임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찢으심으로 언약이 성취됨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 안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은혜에 들어갔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여기서 “바라고”라는 말은 앞의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헬 엘피스)이라는 의미로 생각했던 단어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느니라”라는 말의 헬라어 ‘카우카오마이’라는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자랑하다’라는 말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위에 서 있어서 그것을 자랑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소망 반대 편에 있던 자였고, 죽음의 자리에 있던 자였고, 없음의 상태에 있던 자였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자랑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앞의 강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한 마디로 십자가라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하나님과 화평의 상태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화평 안에 은혜로 들어간 상태, 십자가를 자랑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세상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3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절). 여기서도 “즐거워하나니”라는 말은 자랑한다는 말이다. 즉 그런데 환난 안에서도 자랑한다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환난”(헬, 들립시스)이란 말은 헬라어 ‘들리보’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 단어는 포도즙에서 즙을 짜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즉 환난이란 우리의 삶의 모든 것 속에서 짜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환난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환난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말씀에 의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 13:2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는 위기에서나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이렇게 강론하였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인 십자가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그 환난 자체가 영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하였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내고 성취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인내”란 단순히 우리가 세상에서 오래 참고 지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헬라어 ‘휘포모네’란 ‘휘포’(~아래)와 ‘메노’(머물다)의 합성어인데 ‘~아래 머물다’라는 뜻이다. 즉 어딘가에 머물러 빠져나가려고 애쓰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말을 여기서 쓰고 있다는 것은 세상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빠져 나갈 수 없어 머물러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힘으로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 자체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 즉 십자가를 자랑하는 상태에 있는 자가 성도이다.
“연단”(헬, 도키메)이란 ‘시험’, ‘시련’, ‘증거’, ‘체험’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시련이나 시험을 통해 증명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문을 ‘체험’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헬라어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의 몸으로 증명되고 그 증거가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에 의해 살아지는 삶으로 소망을 더욱 굳게 하는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환난을 견디고 참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하나님의 화평 안에 있게 하심으로 그 영광인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자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20191103 강론/김영대).✞
롬26.0501-0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201911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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