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스물다섯 번째 강론
로마서 4:18-25
약속과 믿음
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복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말씀으로 주시고 그 말씀대로 성취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란 단순히 예수님께서 2000여년 전에 홀로 죽으신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과 함께 죽는 죽음이었고 오늘날 그 십자가 사건이 내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비교 마 16:24, 막 8:34)라고 하셨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복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였다(롬 1:1). 때문에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되어 만들어 내는 모든 신은 가짜이며 우상이다. 그 가짜 신과 우상의 극치는 죄의 권세에 매인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무조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을 신으로 더욱 공고히 만들어 주는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선택한 것뿐이다. 이성적인 동의에 불과한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는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우리의 죄성을 철저히 폭로하면서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다. 인간이 착하게 살려고 하는 것으로 자기 의를 내세우는 그것이 우리의 죄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 1:17) 한다고 선언하였다. 죄인이 생명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하늘의 의가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님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의 인물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면서 믿음으로 된 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의의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나타내시기 위하여 철저히 죽은 존재로 보여 주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안에서 산 자로, 없음의 존재에서 있음의 존재로 바꾸어진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주어졌는지 오늘 본문에서 그 근거를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8절)라고 하였는데 우리 성경에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번역한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파라 엘피스 에피 엘피스’라고 되어 있는데 ‘엘피스’는 ‘소망’이라는 말이고 ‘파라’는 ‘반대편’, ‘에피’는 ‘위에’라는 뜻이다. 즉 ‘소망 반대편에서 소망 위에 믿었다’라는 말인데 이 말을 좀더 쉽게 표현하면 아브라함은 소망 반대편에 있었으나 믿음이 그를 소망 위에 있게 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그 믿음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다음 구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19-20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그를 기다린 것은 가뭄과 기근이었다. 그러자 애굽으로 내려갔고 바로 왕에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자신의 신변을 지키려고 하였는데(창 12:10-20) 이런 일이 한 번만 아니라 나중에 그랄 왕 아비멜렉의 위협에서도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창 20:1-18).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창 16:1-3). 아브라함이 99세, 사라가 8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웃었다(창 17:17-18).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에도 사라는 장막 문에서 듣고 속으로 웃었다(창 18:1-15).
이처럼 창세기를 통해서 본 아브라함은 흔히 말하듯이 믿음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의롭게 행동하는 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하였고, 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라고 하며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20절에서는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라고 말씀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주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 의로운 행위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믿지 못했고 의롭게 살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믿음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18절을 다시 보면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소망 저쪽에 있었던 자였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소망에 근접해 있었거나 소망 가까이서 얼쩡거렸기에 소망 위에 있게 된 것이 아니었다. 소망 반대편에 있던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언약을 성취하시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을 말씀대로 끌고 가시는 믿음을 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자였고 소망의 반대편에 있었던 자였으며 죽은 자였고 없음의 존재였으나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에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의는 아브라함 내부에서 자체 생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의해 ‘여겨주신 의’였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해서 내가 신앙적으로 어떤 일을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른 바 매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주성성수, 열심으로 구하는 기도, 다른 사람들을 예배당에 이끌어 교회 활동에 참여시키는 전도, 소득의 십일조를 하는 헌금 등 이런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본질은 어디서 가장 극명하게 잘 드러났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기 위한 약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어떤 행위로도 자신의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원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가 결국 아브라함을 설득하고 회유해서 그를 구원했다는 식으로 아브라함의 구원에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이끄신 것이 그를 의로 여기시는 근거가 되었을 뿐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의 안에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 자기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한 말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자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인데 그것은 곧 ‘믿음에서 믿음까지’ 혹은 ‘믿음으로부터 믿음까지’인데 우리의 믿음이 결코 개입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의 믿음도 의도 우리의 것이 아니기에 주신 분께 돌려드리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그래서 우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하였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디도미’(넘겨주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셨다는 그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겨주셔서 언약을 완성하셨는데 그 은혜를 받은 자는 이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넘겨주게 되는 자가 성도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영광인 십자가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을 23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3-25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의로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베풀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근거가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바울 사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어디를 향해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최종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통해 드러난 의라고 바울은 설명한다. 그렇게 아브라함을 이끄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율법으로 의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누리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약속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육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없이 만들어낸 이스마엘은 부정당할 수밖에 없고 이삭만 약속의 아들로 세워졌듯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내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이스마엘에 불과하며 그 이스마엘은 날마다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존재하게 된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베푸시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에 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20191027 강론/김영대).✞
롬25.0418-25 약속과 믿음(2019102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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