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열세 번째 강론
로마서 2:6-11
악한 행위와 선한 행위
우리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고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넘겨져 있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진노, 심판부터 말해야 하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복음을 구원의 근거로 생각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그것이 자기의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애당초 잘못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을 계시로 주시지 않으면 구원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에 있는 우리의 본 모습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진노와 심판 가운데 넘겨주시고 거기서 구원이라는 조치를 취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 은혜의 은혜 되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지는 구원이라야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란 받을 자의 능력이나 자격과는 관계없이 베푸는 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거저 주시는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신 구원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6-8절)라고 하여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우리의 행위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보통 이 구절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이후에 교회나 사회를 위한 봉사가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 적극적인 봉사를 해야 합니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만약 행위가 없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의 공력을 시험하실 때에 다 타버리고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과 같을 것입니다. 비록 구원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늘나라에서 그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구원인지 모릅니다.”
이런 가르침은 이름만 기독교라고 하였지 불교와 다를 바가 없다. 교인으로서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예 구원받지 못하는 것으로 엄포를 놓는다. 그래야만 교회라는 조직에 충성 봉사하도록 묶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경을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행위가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다시 말해서 심판의 원인과 결과가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이 오느냐 오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렇게 성경을 이해한다면 로마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겁주기 위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겁주기 위해서 진노,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겁을 준다고 해서 인간이 겁먹고 신을 섬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어제 겁먹었다고 해도 오늘 잊어버릴 만큼 잘 잊어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쓰는 말 중에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전생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현재의 행․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내세에서의 행․ 불행이 생기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불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관계없이 자기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말로 쉽게 쓰고 있다. 원인과 결과의 제공자가 철저히 인간 중심에 있다.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자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혹은 생애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면 자신의 행위가 신의 진노를 일으킬만한 요소가 어떤 것이 있었는가 싶어 더듬어 본다. 그러다가 혹시 무슨 문제가 발견되었다 싶으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도를 한다든지 헌금을 한다든지 목사의 심방을 받는다는 것 등으로 부산을 떤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진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무당의 푸닥거리와 같다. 결국 인간은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이것이 바로 선악 체계 속에 있는 인간의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행위란 본래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을 로마서 1장에서 이미 말씀하였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행위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행위이다. 이렇게 죄짓는 행위대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에 넘겨진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심판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헬라어 본문에 보면 “보응”이라는 말이 ‘아포디도미’인데 마태복음 6:4,6,18에서는 ‘갚는다’는 말로 번역되었는데 이 말은 ‘파라디도미’(넘겨주다)라는 말과 다른 단어이지만 같은 뜻을 가진 말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다시 돌려주다’, ‘다시 넘겨주다’, ‘도로 주다’라는 뜻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하는 행위에게로 다시 돌려 주고 넘겨 주신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행위란 불의인데 우리의 행위를 그 불의 가운데 다시 넘겨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서 “참고 선을 행하여”(7절)라고 하니까 마치 우리가 참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참는다’는 말은 ‘휘포모네’인데 보통 ‘인내’라고 번역되는 말로 ‘휘포’(~아래)라는 말과 ‘메노’(머물다)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참는 것, 인내란 어디 아래 머물러 있는 것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하심 아래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선한 행위란 오직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언급되는 “영광”, “존귀”, “썩지 아니함”은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한 말들이다. “썩지 아니함”(헬, 압달시아)이란 ‘불멸’, ‘영원한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는 곧 부활을 뜻하는 것이다(참고 고전 15:42,54).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한 행위 아래 머물러 있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속성인 “영광, 존귀, 부활”을 추구하는 상태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것이 영생이라고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하였으며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썼다.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선하심 아래 있지 않으면 어떤 상태로 나타나는가? 그것을 8절에서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라고 하였다. “당을 지어”(헬, 에리데이아)는 말은 고린도후서 12:20, 야고보서 3:14에서는 “다툼”이라고 번역된 말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다툰다는 뜻이다. 여기서 왜 ‘다툼’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하면 10절에서 “평강”과 대조해서 말하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구원, 영생은 하나님의 속성인 “영광과 존귀와 평강”에 거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9-10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한 일하심 아래 있지 않는 것은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곧 “불의”인데 하나님은 인간이 불의로 행하는 그 행위 안에 그대로 넘겨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이며 분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일하심 아래 거하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 부활, 평강에 참여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누구에게는 행위로 요구하고 누구에게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1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라고 말씀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 자체는 이미 죄 아래에 있어서 늘 악을 행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노아 언약 안에서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라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이 임하였을 때에 언약의 말씀을 깨닫고 이렇게 강론하였었다.
34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베드로가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을 무슨 뜻으로 쓰고 있는가? “각 나라 중”, 즉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자는 유대인으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나라든 상관없다는 뜻이다. 즉 차별이 없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유대인)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구원이 주어지고 이방인이라고 해서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와 같은 의미로 두 번이나 강조하여 쓰고 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9,10절)라는 표현이다. 로마서에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라는 표현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동일하게 죄 아래,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존재, 즉 죄인으로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심으로 차별을 두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표면적인 것과는 달리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어 보신다고 성경은 증거하는데 그것은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이라는 분류도 아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도 아니고, 식자와 무식자도 아니다.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로 나누는 것도 아니다. 단지 선한 자와 악한 자이다. 여기서 선한 자와 악한 자란 세상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한 행위 아래 머물러 있는 자가 선한 자이고 자기 행위에 머물러 있는 자가 악한 자이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선한 행위 아래 있는 자와 자기 불의의 행위 아래 있는 자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선한 행위 아래 있는 상태가 영생이며 자기 불의의 행위 아래 있는 상태가 하나님의 진노, 심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경건치 아니하고 불의를 행하는 모습 그대로 버려두신 상태에 있는 자로 구분된다.
그러므로 선한 자, 악한 자란 인간의 행위에 따라서 나누어지는 구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나누어지는 구분이다. 인간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이르게 된 자는 하나님의 선한 일하심에 맡겨진 자이다. 결국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된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다. 그 일하심 안에 은혜로 거하게 된 자를 성도라고 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http://cafe.daum.net/joosung 20190707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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