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12강 로마서 2:1-5 하나님의 심판

불편한 진리 2019. 6. 24. 13:27

❖ 로마서 열두 번째 강론


로마서 2:1-5

하나님의 심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난 것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나타났다고 선언하였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에 넘겨져 불의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가두어 우상으로 만드는 죄의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수 많은 죄의 목록들을 언급한 이유는, 우리가 그러한 죄들을 하나하나 이겨서 정복하고 내 안에서 쳐내어 점진적으로 성화되어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죄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라고 선언한다. 2장에 와서 1절을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는 것은 앞의 구절이 근거나 원인이 된다는 뜻이다.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전했는데 유대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또한 로마교회 교인들은 이미 복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신만은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가상적 물음을 가지고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한다. 


그래서 수 많은 죄의 목록들을 언급하면서 1:32에서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정하심, 즉 법으로 선언하신 것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넘겨진 상태이지만 인간들은 그 죽음을 거부하며 모든 사람들이 습관적이고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을 좋게 생각하고 동의하며 그것을 기쁨으로 삼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단어 “판단”, “정죄”, “심판”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리노’라는 말인데 우리 성경에 ‘분리하다, 고르다, 재판하다, 판단하다, 심판하다, 비판하다, 결정하다, 선택하다, 정죄하다, 송사하다, 결심하다’ 등 다양한 말로 번역되는 단어이다(참고 마 5:40, 7:1, 눅 22:30, 고전 2:2 등). 그러니까 선악과 나무를 취한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기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지만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1:20에서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고 선언하였던 그대로 여기서도 “핑계할 수 없는” 상태라고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절)라고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부르셔서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암 1: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3 이하에서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에 대하여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하셨다(암 1:3-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를 낱낱이 공개하면서 그들의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이방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에도 나타날 것인데 이방인들에게 행하는 심판은 이방인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심판하시고 그 심판은 동일하게 언약의 말씀을 어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도 떨어진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창 12:1-3)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은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때문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시온에서 또한 예루살렘에서 임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니까 순서적으로 이방인들을 심판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언약을 가진 당사자들, 곧 유다와 이스라엘에게서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아모스 3:1-2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근거하여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주신 이유는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였다. 한 마디로 언약의 궁극적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였다. 결국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지향하고 보여 주고자 했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이 독생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로 오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서 심판하셨다는 말씀은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심판의 기준이 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1:1-4에서 하나님의 복음은 아들에 관해 약속하신 것이며 약속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혔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를 따라 된다는 말은 인간이 하는 심판은 진리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심판, 판단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진리와는 상관없는 상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태는 인간이 하는 심판은 외식에 의한 심판이라고 하였고(마 7:1-2), 요한은 “너희는 육체를 따라 심판하나 나의 심판은 진리(참)”라고 밝히셨다(요 8:15-16).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애초부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살아 왔으며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심판하는 그 자체가 죄인이라는 증거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에 넘겨진 죄인들의 모습이다. 여기에 우리가 예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우리 성경에는 그 의미가 명확하게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1절을 가톨릭성경에서는 “그러므로 아,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번역하였고, 킹제임스흠정역에서는 “그러므로, 오,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누구이든 변명할 수 없나니”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성경을 그대로 직역하면 “그러므로 오 사람아! 네가 핑계할 수 없다”라는 말이다. 바울은 여기1절 뿐만 아니라 3절에서도 “오 사람아!”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호격으로 탄식하는 의미의 말이다. 그리고 1장에서 불의를 행하는 “그들을” 이제 로마교회 모든 교인들을 대상으로 “네가”라고 2인칭 단수로 표현하여 불의를 행하는 그들이 ‘너’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그러므로 1:24-32에서 열거하고 있는 죄악들에 대하여 나는 예외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나도 예외가 될 수 없고 그 죄악의 목록 속에 자신이 있음을 발견하는 자가 성도이다. 이런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심판 속에 늘 있는 자이다. 십자가의 심판 속에 늘 있다는 것은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한 번 십자가에 죽었던 경력, 과거에 나도 그렇게 죽은 적이 있다는 경험 그런 것은 복음,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날마다 발생되는 자여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4절)라고 쓰고 있다. 이 말씀을 좀 더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회개하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네가 하나님의 인내, 절제, 자비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우리들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바울은 더욱 분명하게 이렇게 밝히고 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5절). “고집”(헬, 스클레로테스)이라는 말은 ‘무감각’, ‘굳음’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개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무감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 성경대로 보자면 마치 먼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 말씀을 직역하자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나타남, 그것이 곧 진노의 날이며 지금 자기 안에 그 진노를 쌓아가고 있도다’라는 말씀이다. 즉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현재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자기 안에 진노를 쌓아가고 있고 그것이 곧 진노의 날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나타남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잘 나타내주고 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6-21)



율법으로 행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이런 죄성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믿음이 일한다고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4-6)



내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주체자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회개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회개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그렇게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회개란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하고 내 안에 진노를 쌓아가는 욕심을 향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신 것이다. 나는 열심히 세상을 향해, 나의 욕심과 죄성을 따라서 달려가고 있는데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꾸 십자가로 되돌리신다.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얼마나 큰 저주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보게 된 것이 복이다. 오늘날 종교사업을 하는 무수한 교회들 속에 바로 나의 죄악상이, 우리의 거짓됨이, 교회의 불의가 그대로 다 들어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죄악상을 그대로 낱낱이 날마다 보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의 수많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거짓 설교, 비복음의 선포를 보면서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어떤 하나님이 좋은가? 밥 퍼주고 장학금 주는 하나님, 내 자녀들을 남부럽지 않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 나의 부동산을 높은 가치로 만드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인가? 아들을 십자가에 던지면서 진노하셨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이미 우리를 그 심판 아래에 두셨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라는 한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주어진 십자가가 은혜로 받아 들여져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623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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