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열 한 번째 강론
로마서 1:28-32
하나님께서 정하심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를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전제하고 있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그 창조를 믿어야 하는 종교라는 뜻이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과 창조 이후의 세계를 갈라놓고 자신의 뜻을 언약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다는 의미는 창세 전 약속(묵시)을 창조된 세계(역사)를 통해 보여 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언약을 보여 주고 설명하는 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죄라는 문제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수 많은 죄의 목록들이 열거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죄의 목록들을 제시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런 것들에 대해 조심하라고 하는 내용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쪽에서 나타내셔야 되는 이유가 세상은 온통 인간의 불의 안에 진리를 가두어 버리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그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들을 내버려 두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는 것은 그냥 방치가 아니라 인간들을 죄 가운데 넘겨 주신 것이며, 곧 죄 아래 가두어 두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심으로 자신의 의를 긍휼과 은혜로 베푸신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창조주를 언급하며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절)라고 여자를 먼저 언급한 이유도 창조 질서와 원리로 복음을 설명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흔히 동성애자들이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에 걸려 그에 대한 보응을 받는다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갇혀 죄를 밥먹듯 물먹듯 죄를 행하는 그것 자체가 보응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동성애자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원리를 뒤집어 버리는 죄 가운데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28절에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는데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이미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불의 안에 진리를 붙잡아 두는 자들’이다. “마음”이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말이고 “싫어하매”(헬, 도키마조)라는 말은 ‘시험하여 확증한다’는 뜻이다. 즉 인간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확증하여 자신들의 지식(마음) 안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상실한 마음에 넘겨 주셨다. 여기 “상실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 버린 상태이다.
“합당하지 못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 카데코’인데 ‘메’는 ‘아니’라는 부정을 나타내고 ‘카데코’는 ‘카타’(~에 대하여)와 ‘헤코’(도달하다)의 합성어로 ‘~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즉 죄(헬, 하마르티아)를 과녁에서 벗어난 것으로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중심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그것이 바로 죄의 권세 아래에서 죄를 행하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바울은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0절)라고 여러 다양한 죄악들을 기록하였다. 여기서 이 모든 단어들을 헬라어로 찾아서 더 자세한 뜻을 찾아 본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바울은 죄들에 대한 목록을 빠짐없이 언급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죄의 권세에 넘겨져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며 피조물을 열심히 신으로 섬기는 상태대로 두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이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죄의 본성대로 하도록 두신 것이 지금 계속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예외인 자가 누가 있는가?
이제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절). “사형에 해당한다”라는 말은 죽음에 넘기워졌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이란 하나님께서 법으로 선언하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이 생각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창조 때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고 선언하신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사탄은 뱀으로 다가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라고 하였는데 인간은 거기에 동의하고 사탄과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상이 창조 때 에덴동산에서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바울 사도는 선언한 것이다. “옳다 하느니라”(헬, 쉬뉴도케오)는 말은 ‘공통적으로 좋게 생각하다’, ‘승낙하다’, ‘만족해 하다’, ‘허락하다’, ‘동의하다’, ‘기쁨을 갖다’는 뜻이다. “그런 일을 행하는”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습관적으로 계속 행하는 것을 말한다. 즉 습관적이고 계속적으로 죄를 짓고 행하는 자들을 좋게 생각하고 동의하며 그것으로 만족하며 기쁨을 갖는 것이 모든 죄인들의 모습이고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장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롬 11:1-2)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인간들을 죄 가운데 넘겨 주셨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는 일을 하시기 위함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버리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버리셨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그 죽음의 자리, 진노의 자리에 버려두심으로 자기 언약 백성들을 살리셨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다. 홀로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 그분이 당하신 것은 실로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진노였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진노 때문에 이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진노를 면하게 되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떨어진 진노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 몸을 버리신 아들 안에서 사는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은 본래 죽음을 향해 늘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죽음에 넘겨져 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은 자가 살려줌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이제 나를 살려준 분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세상의 것을 버리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들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몸조차도 버리셨기 때문이다.
호세아 4:6 이하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7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8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 9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10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호 4:6-10)
여기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란 단순히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차원이 아니며 공부해서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워서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약의 말씀 안에서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과 하나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번성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모습으로 살았다. 번성할수록 범죄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죄인들의 모습이며 곧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오늘날 교회들은 자꾸 쌓아놓고 불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거짓 교회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많은 교인들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짓 교회가 많다는 것이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그러한가 아니면 하나님은 진짜 계시지 않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왜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 않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거짓 교회들이 팽배하고 복음이 왜곡되어 가짜 복음이 횡행하여 교회 같지 않은 교회들이 종교 사업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 교회들이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한 모습이다.
본문의 여러 가지 죄악상들은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모습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참된 교회, 성경에서 말씀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진정으로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인줄 알지 못하고 있다. 실로 지상의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그대로 다 담아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예외이다. 주성교회는 제외되어 있다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많은 교회 수와 교인들의 엄청난 숫자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버려두신 모습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짜 교회가 왕성하도록 버려두셨다. 그래야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으로 복음의 말씀에 의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짜 복음을 전하는 가짜 교회가 있음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이 땅에 제시될 수밖에 없으며, 십자가로 나타난 진노가 오늘 우리들 모습 속에 그대로 내재되어 있음을 말씀으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시고 확인시켜 주심에 면목없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616 강론/김영대).✞
롬11.0128-32 하나님께서 정하심(201906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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