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15강 로마서 2:17-24 유대인과 율법

불편한 진리 2019. 7. 21. 23:59


로마서 열다섯 번째 강론


로마서 2:17-24


유대인과 율법

 


앞의 본문 강론을 통해 우리는 율법적 행위에 대하여 이미 생각했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있다면 이방인에게는 자기 율법이 있어서 그 율법적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철저히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 바로 끊임없이 율법적 행위를 만들어 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으로 그 실례를 들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본문을 보면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17-20)라고 말씀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만 율법을 주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선민 의식으로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불리워진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러한 유대인들의 훌륭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라고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죄를 공격한다. 유대인들의 죄를 공격하되 그들이 의지하며”(17), “자랑하는”(23) 율법을 들어서 지적한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그들의 훌륭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부분에서 스스로 믿으니”(20)라고 폭로한다. ‘믿는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페이도인데 확신하다, 동의하다, 신뢰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에 스스로’(, 세아우트)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직역하면 당신 자신에게혹은 당신 자신과 함께라는 말이다. 즉 당신 자신에게 확신한다는 것은 자기 신념, 자기 믿음이라는 말이다.


본문을 잘 보면 바울은 두 측면에서 그들의 죄악상을 지적하고 있는데, 17-20절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민이요 율법을 갖고 있다는 자만심에 대한 지적이고, 21-23절에서는 그에 따른 위선적인 행동을 폭로하고 있다. 즉 잘못된 믿음에 의해 나오는 행위는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다. 언약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신다는 차원에서 주신 말씀이지 유대인들이나 우리 인간들이 행하고 이루어야 할 말씀이 아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언약의 말씀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받았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언급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1-23). 하나님의 말씀을 언약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위한 계명으로 받았지만 그것조차도 실제는 율법(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지적이다. 오히려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고 하면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52:5)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자기 신의 힘이 센 것으로 여겼고 전쟁에서 지면 자기들의 신이 약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침략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독하였는데 항상”, “종일토록더럽혔다고 하였다. 이방인들의 이 모습이 바로 유대인들의 모습이라고 바울은 폭로한다.

결국 유대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위대한 민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기준에 절대 미칠 수 없는 죄인임이 폭로되고 말았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씀이 단순히 로마 교회 교인들, 특히 유대인 교인들 향한 말씀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라는 이들이 사탄의 회당”(2:9, 3:9)이며 여기에 바울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빌립보서 3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3:4-6)

 

바울은 과거에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잡아 들일 생각으로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9:8)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9:9)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완전히 죽은 것과 같은 상태였다는 뜻이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말미암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9:18)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곧 바울이 율법으로 행한 것이 맹인과 같은 상태였고 곧 죽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유대인이나 바울과 다른 존재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율법을 주신 이유는 모든 인간, 즉 모든 죄인들의 모습을 표본으로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모습은 죄인들의 모습이요 그것이 곧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최고라고 여겼고 그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공격하시며 그들의 의는 천국과 상관없는 것이라고 폭로하셨다. 그렇다면 어떤 의라야 천국과 관계된 것인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이른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이다.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라고 하였으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결론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8:14)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와 전혀 상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자기를 의롭하고 믿는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 하나님까지도 멸시하고 모독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인간의 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주어져야만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이미 로마서 서두에서 선언한 것처럼 복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0-22)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율법을 통해 철저히 밝히셨다. 성경이 이렇게 우리의 불의, 율법적인 행위를 철두철미하게 폭로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십자가로 인간의 불의와 하나님의 의가 완전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란 인간들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행위와 우리의 죄악된 행위는 하나님 앞에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위를 의지하는 죄인된 우리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고 율법으로 더욱 선명해졌다. 죄인이 행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은 다 하나님의 영생을 내 것으로 쟁취하려는 도둑질이며 세상과 짝하여 우상으로 만드는 간음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의에 미치도록 애착을 갖는 존재이다. 그 자기 의가 불의이며 그 불의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의를 멸시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죽음이 임박한 만년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3-16)

 

바울 사도가 그러하였다면 나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나는 유대인과 다른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유대인과 하나도 다를 바와 없이 오늘날 나나 우리는 자기 행위를 믿는 자기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며 십자가의 원수 노릇을 하는 존재이다. 끈질기게 하는 자신의 기도를 믿는 믿음, 폼 나게 바치는 자신의 십일조와 헌금을 믿는 믿음, 이웃을 예배당으로 인도했다는 자신의 전도를 믿는 믿음, 정성으로 하는 자신의 예배를 믿는 믿음, 열심에 열심을 더한 자신의 봉사를 믿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된 성도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721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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