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10강 로마서 1:24-32 내버려 두사

불편한 진리 2019. 6. 10. 16:56

❖ 로마서 열 번째 강론


로마서 1:24-32
내버려 두사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약속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이심을 천명한 이후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선언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계시된 것과 대비해서 왜 하나님의 진노가 계시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진노 아래 두셔야 했는가를 알아야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의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의와 하나님의 의를 대조하여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 현상을 24절 이하에서 말씀한다. 그래서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절)라고 했고,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절)라고 하였으며, 그리고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절)라고 말씀하였다.

이 세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내버려 두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헬라어로 보면 ‘파라디도미’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 곳곳에서 ‘넘겨 주다’, ‘잡히시다’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었는데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행 3:13, 고전 11:23 등),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나타낼 때 반복적으로 쓰고 있다(마 26:15-16, 21, 46 등).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말을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뜻으로도 사용하였다(롬 4:25, 8:32). 그렇다면 이 말은 단순히 내버려 두셨다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라고 하였는데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그들을 마음의 정욕 안에 넘겨 주사’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자기 죄로 인한 더러움의 상태에 넘겨 주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으로 26절에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라는 말이고, 28절에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라는 말이다. 그러면 마음의 정욕 안이 무엇이며 무엇이 더러움인가?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였다. 즉 세상이 육신이고 그 육신이 바로 우리의 정욕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세상에 넘겨 주셨다는 것이다. 진리를 왜곡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자기 몸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마음에 근원적으로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죄성에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넘겨 주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이 취미삼아 하는 작업이 아니라 집요하며 본능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5절)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조물주”라고 번역한 말은 ‘창조주’라는 말이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과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인간들은 날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뇌까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한계를 느끼면 하나님을 찾지만 정작 자기 자신(神)을 위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마음의 정욕 안에 갇히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며 부끄러운 욕심에 넘겨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때에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하는 것으로 인간이 자기 정욕 안에서 사탄의 거짓에 편승하여 부끄러운 상태가 된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바울은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b-27절)라고 하였다.
“순리대로”(헬, 휘시코스)라는 말은 ‘자연적으로’, ‘자연스럽게’, ‘본성대로’라는 말을 의역한 것이고 “역리”(헬, 파라 휘시스)의 ‘파라’는 ‘곁에’ 또는 ‘반대로’라는 뜻인데 본성의 곁에 또는 반대로 두었다는 의미이다. 곁에 두어 비슷한 것 같으나 그것은 반대적인 뜻이라는 말이다. 즉 창조 질서대로 하지 않고 그것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고자 하나 그것이 곧 반대적인 모습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26절에서 “창조주”라고 표현하며 창조 때의 용어들을 사용하였다.

이런 문맥에서 26-27절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무조건 동성애가 나쁘며 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본문을 근거로 말할 수 없다. 레위기 18:22에 보면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라고 하였고 또 레위기 20:13에서도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율법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이런 율법을 주셨는가? 이것이 바로 창조 질서와 반대되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 질서란 무엇인가?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2-25)


창조 질서는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서 한 몸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세 전 언약에서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모이신 하나님을 떠나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여자를 취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을 구원으로 설명하고 보여 주실 것을 이 말씀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의 하나됨, 이것이 창조 질서이며 그것이 곧 구원인데 인간들은 남자가 남자를 취하고 여자가 여자를 취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구원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이것이 우리의 죄악상이란 의미이다. 이는 단순히 동성애가 죄이며 동성애를 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식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2-36)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죄 가운데 넘겨 주셨다. 아니 죄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로부터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언약을 주셨고, 또한 그 언약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으며, 그 십자가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왜 이 땅에 보내셨는가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펴 보는 것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한 범죄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곧장 언약을 주셨는데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것이었다(창 3:15).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잇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계속해서 언약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 내용 중에서 우리가 잘 아는 신명기 28장에서 복과 저주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 보자.
1-2절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신 이후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디서든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15절에도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라고 하면서 어디서든지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에 따라서 새삼스럽게 복을 내리거나 저주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복과 저주가 임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를 말씀하심으로 복 안에 있는 상태, 저주 아래에 있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 있는 상태가 복이요, 언약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상태가 곧 저주의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의 하나님을 거부하였다.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신 31:16)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1:16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실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아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이제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처음 아담에게 주신 약속, 즉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승리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들은 못 믿는다는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방문하셨을 때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다. 십자가를 믿을 인간은 이 땅에 아무도 없다. 인간들의 손에 살해당한 하나님을 어떻게 믿겠는가? 이것은 인간들의 상식 안에 있는 신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하여금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609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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