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9강 로마서 1:21-23 하나님을 알되

불편한 진리 2019. 6. 3. 12:28

❖ 로마서 아홉 번째 강론


로마서 1:21-23

하나님을 알되



종교전문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어떤 종교든지 구원의 길은 달라도 결국은 정상에서 만나며 진리는 하나로 귀결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심을 중요하게 여기고 지극한 정성을 나타내 보이면 하나님이 감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가짜 하나님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란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나타내 주시고 찾아 오셔야만 되는 것으로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게 되었다는 것은 나의 깨달음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기 때문에 19절에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이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기본적인 마음을 가진 선한 양심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고 앞의 강론에서 생각했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할 자와 오히려 천국의 비밀을 가리워 알지 못하게 할 자를 구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오셨고 죄악된 이 땅에 말씀이 떨어지니 천국 백성인 자와 아닌 자가 나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절)라는 말씀은 자연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 자체가 핑계할 수 없는 목적으로 나타내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우리는 그 어떤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우리 죄인들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것을 21절에서 이렇게 밝혀 주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리고 이어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2-23절)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서 본래 자신을 나타내신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는데 “생각”이라는 말은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며 “허망하여지며”라는 말은 ‘우상숭배하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사악한 마음으로 어두워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으며 토론하고 논쟁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22절의 “어리석게 되어”라는 말은 ‘바보가 되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지혜 있다고 하지만 바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보가 된 상태가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썩지 않는 것을 썩는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23절에서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이라고 하였는데 “우상”이라는 표현은 의역으로 집어 넣은 말이고 본문을 직역하면 ‘썩어질(깨어지기 쉬운) 사람과 날아다니는 동물과 네 발을 가진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의 모양으로’라는 말이다. 즉 이 땅의 모든 존재들은 깨어지고 썩어질 것들인데 깨어지지 않고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런 것들로 대체시켜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영화롭게”(헬, 독사조) 한다는 것이나 “하나님의 영광”(헬, 독사)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난 상태’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셨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썩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는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온갖 종교적 행위는 자기 정성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요 우상이다. 이만큼 인간은 우상에 대하여 적극적이다. 그냥 하나님을 외면하고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철저히 썩어지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것이 생명에 떠나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그러기 때문에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어떻게 하든지 우상으로 바꾸어 놓고야마는 성미이다. 어제 하나님을 믿었다고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지 말라. 어제 알게 된 하나님은 이미 내 안에서 자기를 위한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성경의 하나님과는 판이하게 다른 하나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하나님의 복음을 나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의는 나의 의로, 하나님의 믿음은 나의 믿음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신앙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쪽에서 계시하지 않은 것은 다 가짜이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말씀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날마다 말씀에 비추어보지 않으면 안 될만큼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17절에서 이미 상고한 바와 같이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곧 약속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의로 이 땅에 나타나셨다. 하늘의 의가 주어지지 않고서는 누구도 믿음에 합류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의에 합류될 수 있고 그 의에 합류된 자가 믿음 안에 있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의 기준이 되신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만이 의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으로 믿어진다면 그 순간부터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보게 되어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에 떨어졌을 때에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이 말씀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마 27:46).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마태복음 26:39 이하에 나오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도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라고 하셨다. 


그런데 산상수훈(마 5-7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셨다. 그 전후 문맥에서도 보면, “너희 아버지”(마 6:1,8,15,) 혹은 “너의 아버지”(마 6:4,6,18)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또한 십자가를 지셨을 때에는 “내 아버지” 또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다. 여기에 우리의 난처함이 있고 당혹스러움이 있다. 왜 그런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고 말씀하셨는데 막상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진노를 받으시면서 절규하셨던 이 말씀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시편 22:1 다윗의 고백이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실 언약을 주신 것 때문에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다. 그 때에 터져 나온 말이 바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부르짖음이었다. 다윗의 부르짖음은 단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외로움과 고통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다. 


다윗에게 있었던 고통, 고난은 다윗 언약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에 다윗의 고난은 언약 안에서 이해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다윗 언약 안의 고난은 언약의 성취자를 향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선언하신 데에는 인간들의 하나님을 거부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인간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하나님이요, 예수님 자신의 아버지셨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은 인간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과 너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와 너의 아버지로 갈라 놓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는 십자가의 하나님이고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갈라 놓은 너의 하나님, 너의 아버지는 죄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이고 아버지이다. 실로 십자가에 아들을 못 박아 진노를 쏟아 부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가 곧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눅 22:20). 하나님께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의 모든 면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르신 나의 하나님이란 새 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이시다. 즉 새 언약의 현장인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고, 십자가에서만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 자로 주님과 같은 운명에 놓인 자라야만이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며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함께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어서 하나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 그래야만 무조건 나 자신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하나님이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우상이요 가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소멸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믿어지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성도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해 그렇게 일 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서신을 보낼 때에도 이렇게 썼던 것이다.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http://cafe.daum.net/joosung 20190602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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