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여덟 번째 강론
로마서 1:18-20
하나님의 진노
말씀을 강론할 때 한국 교회에 대해서 자주 말하는 것은 교회의 잘못을 들추어 내고 비판한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우리 주성교회가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항상 말씀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제가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것 속에는 주성교회가 예외일 수 없다. 십자가에 비추어 항상 말씀에 일치하는 교회의 모습인가를 점검해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성경이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논리의 흐름을 좇아가기 위해서 잠시 되돌려 생각해 보자. 16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복음만을 자랑하겠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왜 그토록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 11절에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기 위해서라고 하였고,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16절과 17절에서 밝혀 주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은 복음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오직 믿음으로부터 믿음까지 계시되었다고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덮혀진 자는 그 믿음에 의해 살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왜 나타나야 했는가?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 18절 이하이다. 개정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씀도 본문에 충실하게 쉽게 풀어서 보자면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의 안에 진리를 붙잡아 두는 사람들의 모든 불신앙과 불의함에 대해서이다”라는 말씀이다. 문법적으로 표현하자면 ‘현재 진행형 수동태’ 문장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지금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명확하게 17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계시되었다)”라고 하였고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계시되었다)”라고 말씀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계시되었고, 믿지 않음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진노가 계시되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세상 사람들의 믿음 없음의 상태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로 계시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란 24절에서 하나님께서 믿음 없음의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신 것으로 표현하였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나무를 먹음으로 추방되었다.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3:15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인의 후손이 나타나서 뱀의 머리를 밟는 역사를 일으키시겠다는 약속이다. 그 때에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생명)라고 하였다(창 3:20).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을 때에 아담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노 안에 약속이 내포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하나님의 진노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은 언젠가 약속에 의한 여인의 후손이 오면 모든 진노가 그에게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약속 안에서 유보된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떨어졌는지를 나타내 주셨다. 하나님의 진노는 십자가에 최종적으로 임했다. 아니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상태를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절규하셨던 십자가는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떨어진 자리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이 홀로 다 받으심으로 대속의 죽음을 치르신 것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유일한 하나님의 의가 되신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내가 죽은 현장임을 늘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주님의 죽으심이 어떤 의미인지 날마다 반복하여 되새기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받으신 아들만 생각나게 될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하나님의 의로 선포한 다음에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마 교회 성도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든 관심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세상에 대하여 진노를 품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뺀 복음 이야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인들이 좋아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교회들이 많다. 인간 편에서 기대하는 신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신이다. 아무리 유능한 신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저주와 진노를 퍼붓는 신이라면 거부하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만약 한다 하더라도 짧고 간단하게 대충 어물쩡 넘어간다. 이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요구사항이다. 지금은 인간들의 심성에 맞춘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상품만 즐비해 있는 느낌이다.
물론 사랑의 하나님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전적으로 다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니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인간 중심의 사랑이고 우리를 위한 사랑의 하나님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다는 이기적인 사랑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왜곡이다. 아니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 자신에게 저주와 진노를 품고 계시는 하나님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종교가로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것이 불의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의와 대조된 의미(참고 롬 3:5, 6:13, 벧전 3:18), 진리와 대조된 개념으로서 불의라고 표현한다(참고 롬 2:8, 요 7:18, 살후 2:12, 고전 13:6). 우리 성경에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씀은 사람들이 진리를 붙들고 있긴 하는데 그 진리를 의롭지 않는 상태에서 붙들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19절에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라고 선언한다. 이 말씀을 많은 설교자들이 누구나 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식으로 많이 해석하는 데 이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신에 대한 생각을 가지는 일반적인 인간의 종교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종교성으로 하나님을 찾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복음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진노를 피하고자 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 인간들이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외쳤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면 그것을 어떻게 피하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쏠리게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요한은 “회개하라!”(마 3:2),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 3:8)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회개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으로 눈물 조금 흘리면서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정도를 회개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찾아 오심이다. 우리 쪽에서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 안에 있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19절 말씀에 대하여 20절 말씀으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고 설명한다. 이 말씀은 교회에서 흔히들 야외예배를 가서 자연을 보면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저렇게 오묘하게 창조를 하실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자연 속에서 아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며 우상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으로도 불의에 갇혀 있는 죄인은 핑계할 수 없고 할 말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참고 욥 38-39장).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우리들의 실상이다.
주일성수, 십일조 하며 모임에서 봉사를 많이 하고 전도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했다는 것이 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불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상태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 진리를 알며 진리 가운데 있다고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이 하나님의 진노와 관계없는 상태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었다. 불의한 인간이 자기 의로 털끝만큼도 개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절)라고 하였는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아보겠다는 각오와 결심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믿음으로부터 믿음까지 계시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종교적 행위가 불의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18절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서 주님과 더불어 날마다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 것이다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9-10)
(http://cafe.daum.net/joosung 20190526 강론/김영대).✞
롬08.0118-19 하나님의 진노(201905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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