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7강 로마서 1:16-17 믿음에서 믿음까지

불편한 진리 2019. 5. 20. 15:25

❖ 로마서 일곱 번째 강론


로마서 1:16-17

믿음에서 믿음까지


바울 사도가 빚진 자로 표현하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왜 그토록 간절하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을까? 그 이유는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에게나 복음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선포하기 위해 로마에까지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성도를 엄청난 능력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능력하게 만드는 것이며, 말씀으로 해체하여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 부끄러움을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바울은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썼다.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을 따라 쉽게 표현하자면 “왜냐하면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그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한 것과 같다”라는 말씀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복음이 왜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지를 설명한다. 즉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에 인간의 의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때 그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란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표현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알기 위하여 먼저 구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1[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시 98:1-2)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 51:8)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의 의로 나타내고 있다. 죄인들에게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져야 하는 것인데 그 의를 바울 사도는 3장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밝힌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여기서 바울 사도는 율법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의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의로 나타내지 않으면 인간들은 도무지 구원이라는 것은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복음은 처음부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 나갈 수 있는가에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는가 하는 것에 있다. 그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하늘에서 의가 와야 했다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의 의, 이 땅의 의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땅의 것,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종교 행위들은 결코 의라고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모든 종교 행위들을 배설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의미이다. 


우리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헬, 에크 피스튜스 에이스 피스틴)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믿음에서 믿음까지” 혹은 “믿음으로부터 믿음까지”라는 말이다. 우리 성경에는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을 넣어서 번역하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어떤 목표지점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는데 그 믿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지점까지 가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부터 믿음까지 계시되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다른 어떤 것도 개입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처음도 믿음이요 끝도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죄인들이 오직 믿음 안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는 믿음이 없었는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역시 믿음으로 살았다. 그것을 구약 하박국 선지서를 인용하여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이 말씀이 왜 주어졌는가? 하박국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있는 불의를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기도가 빨리 응답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 하나님께 항변하는 식으로 기도했다(합 1:2-4).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의롭게 사는 자들이 세상을 의지하며 사는 자들에 의해 무시 당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한 것은 예루살렘을 망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그가 기도한 것은 불의를 행하는 악인들에 의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의인들을 속히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다(합 1:2). 그것은 악이 횡행한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율법)에 신실한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하박국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신다(합 1:6).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비언약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악한 자들을 들어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선지자는 놀랐다. 2:1에 보면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라고 하던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런 말씀이 임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여기 “반드시 응하리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가 반드시 오신다”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종말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종말이다. 환언하자면 하나님의 의가 오면 종말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이 종말을 오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응답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또한 종말의 때까지 하나님의 묵시는 계속해서 증거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합 2:4). 


여기서 믿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무나’라는 말인데 이 말은 보통 ‘신실함’ 혹은 ‘진리’로 번역되고 때로는 “성실하심”(시 100:5), “진실하게”(왕하 22:7)라는 말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 호세아 2:19-20에서는 “내(하나님)가 네(이스라엘)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히, 에무나)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신랑이 되어 자기 언약 백성들을 신부로 삼아 결혼 관계가 영원토록 신실하게 지키실 것을 말씀하셨다. 부부의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해 음란한 아내 고멜을 찾아서 데려오는 선지자 호세아의 모습을 통해 바로 하나님의 자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실, 진실,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보증한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리’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 그런데 이 단어가 출애굽기 17:12에 보면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라는 말씀이 히브리어 ‘에무나’이다. 즉 버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신을 위해 하는 종교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지는 의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의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하며, 죄란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결국 하박국 선지자는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소출이나 우리의 양이나 외양간의 소든 밭의 식물이든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일지라도 궁극적으로 언약대로 말씀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이루시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합 3:17-18). 


‘믿음으로부터 믿음까지’라는 말씀은 우리가 자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발하며 동시에 철저히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계시된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믿음 안에 있는 성도는 자신의 의를 날마다 부정하며 살아지는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는 그것은 곧 오직 하나님의 의가 되시고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자는 뜻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의 의이고 믿음이며 그 믿음 안에 있는 자가 의인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 믿으면 되잖아?”라고 말하고 “내가 예수를 믿는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무조건 “믿습니다!”라고 하는 식으로 자기 최면을 걸고서 사는 것을 가지고 결코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편이니까 혹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몇 배 혹은 몇 십 배로 갚아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늘에서 오신 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뜻(말씀)대로 우리를 끌고 가시는 상태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 이끌려 살아지는 삶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519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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