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다섯 번째 강론
로마서 1:13-15
빚진 자
바울 사도는 로마에 가기를 심히 원한다고 하면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절)라고 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은 교회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이 빚을 갚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빚진 자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나라가 미국의 선교를 받았는데 그 빚을 갚는 것은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선교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빚진 자의 심정, 즉 빚을 갚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이 말씀을 이해한다. 만약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바울이 여러 교회들로부터 후원을 받았었는데 그것이 마음의 빚이 되었다면 헬라인이나 야만인에게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빚진 자라고 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그런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나 또는 여러 교회들에게 빚진 것으로 설명하지도 않을 뿐더러 또한 빚진 것을 갚고자 하는 심정으로 산다고 해서 누구에게 빚을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바울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서 복음을 받은 것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는 존재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라는 표현은 바울 사도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헬라제국의 문화권 속에 있는 입장에서 헬라어를 쓰고 헬라문화를 받아 들이고 사는 자를 헬라인이라고 하였고 그 외의 사람들은 야만인으로 치부했다. 헬라인은 지혜 있는 자의 상징이었고 그렇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였다. 따라서 이 표현은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그러면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무슨 빚을 졌다는 것일까?
성경에서 빚진 것과 죄지은 것을 같은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마치 빚을 진 것과 같은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을 왕이 다 탕감하여 준 비유(마 18:23-35)나 두 빚진 자 비유(눅 7:41-42)에서 빚을 졌다는 것을 죄를 지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렇게 볼 때 바울 사도가 “빚진 자”라고 한 것에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단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측면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2절을 다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가 지금 복음을 어떤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 나무로 범죄한 이후에 곧 약속으로 주신 것인데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바울 자신은 약속의 성취자가 되시는 그분의 종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대로 십자가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분이 바울을 종으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바울을 왜 불렀나? 1절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5절의 말씀과 같이 “그의 이름(예수 그리스도)을 위하여”, 6절의 표현대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또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약속의 성취와 같은 맥락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약속 안에 바울이 있다는 뜻이다. 바울이 자신을 “빚진 자”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복음 안에서 탕감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으로 언약을 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핵심적인 선언을 이렇게 하였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1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사 9:1-3)
이 말씀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방에게까지 복음이 증거되어지는 말씀으로 이루어졌다고 마태복음에서 밝혀주었다(마 4:12-16). 바울 사도 역시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셨고, 그 약속을 성취하신 근거에 의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도록 바울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주어졌다는 의미에서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후손을 이스라엘 나라로 만드시며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것은 약속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통로요 또한 이방인에게 복음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은혜를 입은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결국 바울은 참 이스라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은 자로서 헬라인이든 야만인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드러내어야 할 빚진 자라는 뜻이다. 빚진 자는 탕감을 받은 은혜를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할 자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복음일 수밖에 없다.
로마서는 바울 사도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말하면서 바울 자신을 로마에 있는 성도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을 읽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된 자인 오늘날 우리들 역시 바울과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빚진 자일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 차원에서 빚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탕감받은 은혜를 복음으로 세상에 드러내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빚진 자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헬라인들은 지혜로운 자들이기 때문에 헬라인에게는 복음을 나타내고 야만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에 복음을 나타낼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헬라인이든 야만인이든, 지혜 있는 자이든 어리석은 자이든 모두에게 복음은 드러나야 한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다 드러났다. 그 하나님의 복음을 바울은 함께 확인하고 서로 안위를 얻으며 함께 진리로 굳게 세워지기 위해 로마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우리 성경에는 “할 수 있는 대로”라고 번역하였는데 실제는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다(새번역성경은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바울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3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바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바울은 로마에 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신령한 은사로 베푸셨다. 신령한 은혜를 받은 자가 성도이다. 즉 하나님이 사랑을 입은 자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거룩이 된 자들이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은 자기 복음을 드러내실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명을 받았으니 받은 사명대로 열심히 주를 위해서 봉사하자는 그런 말이 아니다. 주께서 나를 붙잡으시고 말씀의 성취라는 차원에서 복음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즉 내가 무엇을 이루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인 삶의 형편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의 문제를 잘 풀어주셔야만 복음을 내가 제대로 증거할 수 있고, 내게 물질 주셔야만 많은 헌금으로 선교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빚진 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산다는 말이다. 물론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도 주께서 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http://cafe.daum.net/joosung 20190505 강론/김영대).✞
롬05.0113-15 빚진 자(2019050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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