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17.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불편한 진리 2024. 5. 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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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17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종교적으로 고차원적인 것을 내세우는 곳에서 ‘정신’ 혹은 ‘마음’의 문제를 다룬다. 마음을 내려놓고 비우는 수련을 한다. 그러면 마음이 무엇인가? 사전적인 정의를 보면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 사람의 생각, 감정, 기억 따위가 생기거나 자리 잡는 공간이나 위치”라고 한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생각, 의식, 정신” 또는 “감정이나 기분, 의지나 결심”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산상강론의 여섯 번째 복으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절)라는 말씀이다. 직역하면 ‘복이 있다. 그 마음이 그 깨끗한 자들은, 왜냐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마음이 청결하다 혹은 깨끗하다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였는데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마음”이라는 ‘카르디아’는 말 그대로 ‘마음’인데 헬라적 사고에서 이 단어는 생각이나 상상력의 자리, 의지와 감정과 열정의 자리, 도덕적, 지적, 영적 자리로서의 마음을 뜻한다. 인간 전체의 지적이나 종교적으로 영적 중심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 히브리어 ‘레브’의 역어로 번역된다. ‘레브’는 ‘레바브’의 한 형태로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라는 뜻을 지닌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레브)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생명의 근원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마음이 깨끗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성경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출애굽기 33:20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모세 조차도 하나님 얼굴을 볼 수 없었다면 마음이 생명의 근원을 확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레브)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레브)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은 자기 기준의 선악 체계 속에서 선악을 구분하는 상태가 되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늘 악을 선택하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레브)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53:1)라고 고백하였다. 즉 하나님이 없는 상태의 마음이다.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카르디아)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 7:6-7, 참고 마 15:7-9)

 

예수님께서 이사야 29:13을 인용한 것인데 히브리어 ‘레브’를 ‘카르디아’로 쓰고 있다. “내게서 멀도다”라는 말의 헬라어 ‘아페코’(멀리하다, 삼가다, 떨어져 있다, 자제하다, 억제하다)는 이사야서에서 “멀리 떠났나니”라는 말의 ‘라하크’(‘제거하다’라는 뜻으로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의 역어로 쓴 것이다. 그런데 ‘아페코’에는 ‘이미 돌려받았다’(마 6:2, 5, 16, 눅 6:24) 또는 ‘충분히 가졌다’(막 14:41)라는 뜻도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다는 것은 이미 죄악된 마음을 충분히 가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카르디아)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카르디아)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8-20)

 

“청결한 자”란 ‘카다로스’인데 ‘깨끗한, 순결한, 정결한, 결백한, 맑은’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 ‘타호르’(우리 성경에서는 레 7:19, 대하 13:11, 욥 14:4, 사 66:20 등에서는 “깨끗한”, 창 7:2, 레 16:11 등에서는 “정결한”, 시 12:6에서는 “순결함”으로 번역하였다)나 ‘바르, 보르’(시 19:8에서는 “순결하여”로 번역하였다), ‘나키’(시 24:3)의 역어이다.

‘카다로스’를 마태복음 23:26에서 “깨끗이 하라”, “깨끗한 세마포”(마 27:59),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카다로스)”(요 15:3),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카다로스)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히 10:2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카다로스) 더러움이 없는 경건”(약 1:27), “맑고(카다로스)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계 15:6), “그 성은 정(카다로스)금인데 맑은(카다로스) 유리 같더라”(계 21:18)라고 번역하였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나키) 마음이(레바브) 청결하며(바르)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시 24:3-6)

 

다윗은 언약 안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 즉 메시아로 성전이 될 자를 기대한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란 선을 행하는 자로서 마음이 깨끗하여 진리로 언약을 드러낼 자 그가 하나님의 복, 구원을 이루실 자이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름이 되시는 깨끗한 제물에 대해 예언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타호르)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

 

“깨끗한 제물”이란 인간의 악한 마음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이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깨끗한 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구약에서 ‘청결한, 깨끗한, 정결한, 순결한’ 존재를 계시하는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즉 악한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정결한 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생명의 근원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복을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한다. 제사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제사장은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라고 축복하였다.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는 은혜와 평강을 이루시는 그것이 구원이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4-18)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6-10)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레브)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루아흐)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언약을 처절하게 깨닫고 노래한 것이다. 정한 마음을 창조하는 것을 영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즉 마음과 영을 같은 의미로 교차해서 사용하였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 15:8-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하여 진리의 영을 주심으로 죄악된 마음을 가진 존재가 깨끗한 상태가 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롬 5:8)이라고 하면서 성령으로 십자가 사랑이 부어진 것이 생명의 상태라고 선언하였다(롬 5:5-6). 이런 점에서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누스) 가졌느니라(고전 2:12-16)

 

“마음”에 대하여 ‘카르디아’를 쓰지 않고 ‘누스’를 사용한다. 이때 ‘누스’는 깨닫는 것과 연관된다(고전 14: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성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음을(누스)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라고 하였는데 “열어”라는 말의 ‘디아노이고’는 ‘완전히 열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에 의해 위로 열린다는 의미이다. 죄의 권세에 매여 마음이 악한 자에게 십자가 은혜를 허락하심으로 말씀을 알게 된 마음, 곧 하나님을 보는 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아니 죽는 자가 성도이다(빌 2:5-8)(202405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17.0508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2024052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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