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15.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불편한 진리 2024. 4. 2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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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15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전도서 3:11에 보면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하였다. 영원한 것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은 늘 갈급하고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지만 늘 부족함이고 결핍이며 없음의 상태이다. 그것이 죄의 증상이다.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상태에서는 영원한 것이 없기에 채워질 수가 없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4)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산상강론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짚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이제까지 말씀한 영으로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애통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들이 받는 위로가 어떤 것이며, 그들이 상속받는 그 하나님 왕국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이다. 직역하면 ‘복이 있다. 그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왜냐하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주리고”라는 말은 ‘페이나오’인데 ‘굶주리다, 열망하다’라는 뜻으로 강한 욕망을 의미한다.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히 “지금 주린 자”(눅 6:21)로 표현하였다. “목마른”이란 ‘딥사오’인데 ‘목마르다, 갈망하다, 갈급해 하다’라는 뜻이다. ‘페이나오’는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예컨대 자유, 명예, 명성, 부, 칭송, 깨달음 따위에 대한 열정적인 갈구를 표현한 단어이다. 이러한 욕망은 굶주림과 목마름을 하나로 묶어서 더욱 강력하게 표현된다.

무엇에 대한 굶주림이고 목마름인가? 예수님은 한마디로 “의”라고 선언하셨다. ‘디카이오쉬네’는 ‘공의, 정의, 공정, 의로움, 의, 옳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가 무엇인가? 먼저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을 보면 이렇게 선언한다.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6-8)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9:13)라고 말씀하셨다. 이 땅에 의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인인 척 여기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자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율법의 무거운 짐을 사람의 어깨에 지워(23:2-4).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들고(23:13) 지옥 자식에 되게 만들었고(23:15),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들이었으며(23:16-22),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자들로(23:23-24),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였으나(23:25-26) 외형적으로는 가장 깨끗한 척 하는 자들이었다(23:27-31).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23:33)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율법을 행위로 이루어 내려는 것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의 나라”가 곧 “그의 의”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는 문맥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지칭한다(6:32). 그렇다면 하늘에서 그의 나라를 나타내주시는 것만 의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모든 의”는 예수님께서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이루시는 것이다. 세례는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막 10:38-40). 즉 세례의 본질을 완성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시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전도서 3:14에서 말씀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이렇게 선포하셨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 왕국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왕국(그의 나라)과 그의 의는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시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왕국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 권세에 매인 자들은 오로지 자기 의를 위해 산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니 그 율법을 행위로 지켜 자기 의를 자랑한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1-4)

 

결국 죄인들의 모든 열심은 율법적 행위에 불과하다. 죄인이 자기 의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그 의에 결코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왕국이 하나님의 의로 드러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을 통해서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 19:28)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 왕국,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말씀이 단순히 육적으로 목말라서 이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 왕국, 하나님의 의를 계시하시는 그 현장에서 육적인 목마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예수님께서 목말라하신 것에 대한 극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즉 믿어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예수님의 목마름과 같은 상태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복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이다. ‘코르타조’는 ‘배불리다, 먹이다, 살찌우다’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한 배부른 상태는 굶주림이 일시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영원히 해결되는 것이다.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신 표적에서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마 14:20)라고 하였는데 4,000명을 먹이신 표적에서도 동일하게 이 표현을 하였다(참고 마 15:37). 이는 출애굽 때 만나 사건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십자가로 다 배불리 먹이실 것을 보여주신 표적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4648, 53-55)

 

죄인은 결핍과 부족, 없음의 상태에서 늘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한다. 그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를 떠나 있는 죄인의 실상이다(눅 15:16).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신 표적이나 4,000명을 먹이신 표적을 통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셨다. 그러나 죄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떡을 먹어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찾을 뿐이다(요 6:26). 표적을 좇는 것은 썩는 양식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겠다는 것이다(요 6:27).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 왕국이고 하나님의 의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그 양식이고 물이다.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1-2)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출애굽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를 걷게 하신 것은 이 양식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사도행전에서 “광야 교회”(행 7:38)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가 종말을 산다는 것은 장소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광야에 있다. 그 광야에서 주리게 하시고 낮추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에 이끌려 간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왕국이 되고 하나님의 의가 된 자를 성전(장막)이 된 자들로 표현하여 요한 사도는 이렇게 전해준다.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4-17)

 

(202404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15.050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2024042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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