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14.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의 복

불편한 진리 2024. 4. 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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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14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의 복

 

‘온유함’이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친절하여 화를 잘 내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은 온유한 삶으로 복음을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노를 발하는 상대를 온유함으로 대하면 무장해제가 된다고 하는 처세술을 전하면서 육적으로는 부동산을 얻고 영적으로는 하늘나라 가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설교가 아직도 난무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함은 성격이나 기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온유하게 상대를 대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호구로 여기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는 땅도 부동산이 아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직역하면 ‘복이 있다. 그 온유한 자는 왜냐하면 그들이 그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복이나 애통하는 복과 마찬가지로 온유한 것이 조건이 되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는 복이 아니다. 즉 온유하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이 있는 자가 온유하다는 뜻이다.

“온유한 자”의 헬라어 ‘프라위스’는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이 많은, 온화한, 즐거운’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히브리어 ‘아니’(억압받는, 가난한,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나 ‘아나브’(가난한, 고통받는, 비천한, 겸손한, 유순한, 가련한)의 역어로 쓰여 기본적으로 가난하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한마디로 ‘아니’나 ‘아나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데 타인이 겸손하다거나 온유하다고 평가하는 표현이 아니라 외부적인 어떤 것이 주어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표현하는 단어로 토지를 빼앗겨 가난하게 된 상태,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수탈당한 자를 지칭한다. 그들의 가난은 불법적인 힘에 의해 상속권이 박탈되어 누군가의 도움만 바라보는 상태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나, 애통하는 자 또는 온유한 자는 일맥상통한 관계 안에 있다. 시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아나브)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 37:9-11)

 

“소망”이라는 히브리어 ‘카바’는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라는 뜻이다.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나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차원에서 같은 의미의 반복된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온유한 자란 여호와를 바라고 기다리는 자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성경에서 온유하다는 의미를 어떻게 말씀하는가를 봐야 한다. 처음 쓰인 본문은 모세에 대한 말씀이다.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아나브)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1-3)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신의 동족을 치는 것에 격분하여 애굽 사람을 쳐죽인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하였을 때 모세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여호와께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민 11:11)라고 하면서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5)라고 하였다. 또 물이 없어 모세를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시자 모세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라고 분노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이 나오게 한 것을 보면 모세가 온유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온유하다는 말씀은 문맥을 통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는 것은 빌미에 불과하고 비방한 핵심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뜬금없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말씀한다. 그러면서 7절에서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니라”(민 12:7)라고 하였다.

“충성”이란 ‘아만’으로 ‘확실하게 하다, 신실하다, 믿다’라는 뜻이다. 즉 모세와 말씀하심으로 말씀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하나 되어 하나님 집의 믿음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의 “온유함”이란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으로 도전받고 유린당하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말씀을 나누는 생명 안에 있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반면 이 일의 주동자인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어 죄인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땅에서 가장 온유한 자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신 34:1-6).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신 3:25-28)

 

결국 모세의 온유함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땅을 빼앗겨 가난하고 비천한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는 율법, 여호수아는 믿음을 상징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모세가 하나님 왕국으로 상징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것은 율법만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이고 ‘여호와는 구원자’라는 뜻을 지닌 여호수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시는 분은 땅을 빼앗긴 자로 오셔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땅을 주시는 분이라는 계시를 담고 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프라위스)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겸손”이란 말의 ‘타페이노스’는 ‘낮은, 비천한, 겸손한’이라는 뜻이다. 낮고 비천한 상태의 십자가 죽음이 겸손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는 일에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주신 것이 온유와 겸손이다. 마태복음 21:5에서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하였을 때 “겸손”이 ‘프라위스’이다.

스가랴 9:9의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는 말씀에서 “겸손하여서”라는 말이 히브리어 ‘아니’이다. 즉 가난하여 고통받고 이 땅에서 다 빼앗기는 메시아 그가 온유하고 겸손한 자이다. 그것을 십자가로 나타내신 것이다.

“배우라”라는 말의 헬라어 ‘만다노’는 ‘마드’에서 유래한 단어로 ‘마음을 어떤 것에게로 향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익숙하게 되다, 경험하다, 알게 되다, 이해되다, 신으로부터 지도를 받다’라는 뜻이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라고 한 말씀에서 십사만 사천 외에는 새 노래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적 개념으로 공부하여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죄인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여 십자가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고 진리의 말씀에 익숙하게 된 상태 그것이 곧 “쉼”이다. 헬라어 ‘아나파우시스’는 ‘쉼, 휴식, 중단, 중지’라는 뜻이다.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진 율법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지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하나님 왕국이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다시 살려 놓는 것이다. 세상에서 억압받고 비천한 상태로 온유함과 겸손을 이루신 십자가 앞에 율법적 행위로 돌아가는 것은 더러운 것이고 악이다. “받으라”라는 말의 ‘데코마이’는 선물을 받는다는 뜻을 지닌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온유한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온유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열매라고 하였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온유한 자의 복이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는데 “기업”이란 헬라어로 ‘클로레노메오’인데 ‘상속하다, 상속자가 되다, 획득하다, 소유하다, 얻다’라는 뜻으로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상속의 개념이다. 그래서 ‘그 땅’이다. 그 땅이라면 생뚱맞게 세상에서 표현하는 부동산이 아니라 이제까지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그 땅이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아브라함에게 주신다는 ‘씨(후손), 땅, 복’의 언약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된 언약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말씀한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람들에게 온화하고 친절하며 부드러운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는 죽음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온유함과 겸손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곧 온유한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유한 자가 누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복이다(2024041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14.0505 온유한 자의 복(2024041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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