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59. 창세기 21:22-34 아비멜렉과의 언약

불편한 진리 2023. 11. 12. 18:33

https://www.youtube.com/live/tn_B5zkmAPU?si=1emxl_fhYBCQXUIV

 

창세기 강론 59

창세기 21:22-34

아비멜렉과의 언약

 

하갈과 이스마엘이 브엘세바 사건을 겪는 것과 비견하여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사건을 소개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 그랄 땅에 갔다가 아비멜렉을 만났을 때 혹시 모를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을 혼내시고 그 집안의 태를 닫으셨다가 아브라함의 기도로 태를 여신 사건이 있었다(창 20:1-18).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과 이방인까지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눈앞의 현실에서 이방인의 힘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고 아브라함을 통해 복이 전달되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심으로 언약을 확고히 하셨다. 또한 사라를 보호하심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태어날 씨를 주시겠다는 언약을 지키셨다.

그리고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방문하였다. 아비멜렉은 그 집안의 모든 태가 닫히는 하나님의 재앙이 있을 때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해 태가 열리는 것을 경험하였기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셈이다. 아브라함이 필요한 자였다. 그래서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절)라고 아브라함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분명히 보았기에 아브라함과 언약 맺기를 원하였다.

“아비멜렉”은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왔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힘과 권위를 보여주는 모습이지만 “비골”의 히브리어 ‘피콜’은 ‘강한’ 또는 ‘모두의 입’이라는 뜻이다. 즉 아비멜렉의 입의 역할, 대언자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혼자이다. 아비멜렉과 비골도 아브라함을 “너”라고 하였다. 혼자인 이유는 언약 안에서 사라와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사라’는 등장하지 않고 23:1에서 죽음만 소개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언약의 대표자로서 아비멜렉을 상대하게 되자 나중에는 비골이 말하지 않고 아비멜렉이 직접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게 된 아비멜렉이 직접 하나님께 자신을 위해 구하면 되지 왜 굳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을까? 아비멜렉이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지 자신과 함께 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라의 문제에서 아비멜렉은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책망하는 사건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아비멜렉은 자신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통해서 복과 저주가 결정되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였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23절). “거짓되어 행하지 아니하기를”이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샤카르’는 ‘거짓으로 대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에서 ‘거짓말, 속임, 허위’라는 뜻의 ‘세케르’(출 20:16)라는 명사가 왔다. 열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거짓말’은 단순히 사람을 속이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진리’를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아비멜렉이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에 자기 아들과 손자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전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24-25절). “맹세하리라”라는 말의 ‘샤바’는 ‘맹세하다, 완전하다, 일곱 번 말하다, 간청하다, 서약하다’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대표자로서 선지자로서 언약의 말씀을 완전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라는 언약의 말씀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 언약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 곧 구원이고 영생이다. 그러므로 맹세의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전하였었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것은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어 하나 되는 것이다. 즉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섬기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인간의 행위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결정된다.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라는 말씀에서 “우물”은 진리의 물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비진리의 정신으로 아브라함을 핍박했었다는 비유의 말씀이다. 진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안에서만이다. 이런 점에서 언약 안에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죄인으로 살았던 모든 죄성이 폭로되는 것이 먼저 드러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죄성을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26절)라는 말씀은 아비멜렉이 비록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잠깐 입었지만 자신의 죄성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책망하였다는 것은 진리가 전해지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에서 죄가 철저히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진리를 알지 못할 때는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이비멜렉을 통해 보여준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7-11)

 

바울 사도는 복음을 듣게 됨으로 율법의 의미를 알았다.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가 율법을 도무지 행위로 다 지켜낼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27-31절).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합류되는 것은 번제물이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일곱 암양”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언약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는 과정이다. “따로 놓으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드’인데 ‘자리잡다, 지명된, 세우다, 기둥, 우뚝 세우다, 서다’라는 뜻이다. 진리 곧 복음으로 세워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언약”은 히브리어로 ‘베리트’이고, “세우니라”라는 말은 ‘카라트’이다. ‘베리트’는 ‘언약, 계약, 동맹, 연합’이라는 뜻이고, ‘카라트’는 ‘자르다, 베어내다, 파괴하다, 소멸시키다, 언약을 맺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합류되는 것은 우리의 죄성을 잘라내고 소멸시켜 세우는 하나님 편에서 이루시는 일방적인 약속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일곱’을 반복하여 언급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언약임을 강조하였다. 결국 “브엘세바”라는 ‘일곱 우물’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자기 율법적 행위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14절)라고 말씀과 대조된다.

비진리로 우물을 빼앗았던 아비멜렉의 모습에서 우리의 죄성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아비멜렉은 당당한 입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새로운 관계로 아비멜렉을 끌어들였다. 그것이 언약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관계이고 용서하는 자와 죄를 범한 자의 관계이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일곱 암양 새끼를 줌으로써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과의 관계가 달라진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주는 입장에서 오히려 받는 입장이 되고, 아브라함은 받는 입장이 아니라 주는 입장이 되어 언약을 맺는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과의 관계에서 아브라함은 언약의 당사자, 대표자로서 은혜를 전해주고 흘려주는 주는 입장이고 아비멜렉은 은혜를 받는 입장에 놓였다. 맹세의 우물은 이 지역에서 아브라함의 우월성 즉 은혜의 주도권자임을 분명히 증거하는 우물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땅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언약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이루시는 구원이다.

아비멜렉과 같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물을 주려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 생수, 즉 하늘의 진리의 물을 여인에게 넘겨주신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라고 하심으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분명히 하셨다.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시는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32-34절). “에셀 나무”는 작은 비늘 같은 잎이 잔가지에 촘촘히 붙어 있는 위성류 나무라고 한다. “심고”의 히브리어 ‘나타’는 ‘박히다, 고정하다, 심다’라는 뜻이다. 즉 나무를 고정하여 세워서 언약의 증표로 삼았다는 의미이다. 아비멜렉에게 진리를 전해주고 흘려주는 것만 아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확고하게 하심을 분명히 보여주신 사건이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본문의 초반은 아비멜렉이 언약의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나타났으나 결국 언약의 주도권은 아브라함에게 있었다.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음으로 비록 땅 한 평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 땅에서 한 족속의 왕으로 인정받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언약으로 어떻게 이끌고 계신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언약의 성취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으로 이렇게 이끌려 가는 것이다(202311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59.2122-34 아비멜렉과의 언약(20231112).pdf
0.14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