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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57
창세기 21:1-7
여호와의 찾아오심
본문을 통해 많은 설교자들이 우울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웃음을 주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사업의 실패, 자녀의 비행, 가정의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역전시켜 반드시 웃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 안에는 ‘역전의 하나님’이라는 잘못된 우상의 하나님을 믿는다. 고지론, 깨끗한 부자, 실패를 역전시켜 주시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1절). 앞의 “말씀하신 대로”는 ‘아마르’이고 뒤의 “말씀하신 대로”는 ‘다바르’이다. ‘아마르’는 주로 ‘이르시되’로 많이 번역되었는데 여기서는 “말씀하신 대로”라고 번역하였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다는 뜻이다. ‘아마르’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이라면 ‘다바르’는 그 선언하신 대로 말씀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이다.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사’인데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이루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에는 ‘만들다’라는 단어가 이 외에도 ‘바라’, ‘야차르’가 있는데 흔히들 ‘바라’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고, ‘아사’는 있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 인간이 무엇을 만드는 것을 뜻하고, ‘야차르’는 무엇인가를 조성하고 꾸미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히브리어 자체는 그런 의미로 구분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어떤 단어이든지 하나님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사라를 돌보셨고”라는 말의 히브리어 ‘파카드’는 ‘세다, 계수하다, 돌보다, 방문하다, 감독하다, 소집하다’라는 다양한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돌보셨다는 것은 아비멜렉에게 빼앗길 위기에서 구하셨다는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언약을 선포하시고 그 언약대로 말씀을 성취하셨다는 의미로 본다면 단순히 하나님께서 사라를 돌보신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방문, 즉 찾아오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 14)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조종하신 정도가 아니라 친히 찾아오심으로 언약을 이루신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출 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간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여행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로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말씀의 성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삭을 주셨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찾아오신 것이고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룻 1: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이 ‘파카드’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이유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었다(삿 17:6, 18:1, 19:1, 21:25).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왕으로 오실 것임을 룻을 통해 다윗 왕을 주심으로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 것이었다(마 1:1).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4)
여기서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이 ‘로 파카드’이다. 즉 하나님께서 목자로 찾아오시지 않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그분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것은 목자로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마 9:36).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이는 곧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을 의미한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을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 7:16)라고 누가는 기록하였다. 여기서 “돌보셨다”라는 말의 헬라어 ‘에피스켑토마이’는 히브리어 ‘파카드’의 헬라어 표현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취하는 십자가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이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신 그 의도를 분명히 깨달았는지 모르지만 장례에 참여했던 자들이 이렇게 고백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구약에서 활동한 엘리야나 엘리사 선지자가 온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뜻이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왕상 17:17 이하)이나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왕하 4:17 이하)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장례식에 참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통해 선지자로 오실 메시아를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언약의 성취이며 그것은 곧 새 창조 안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2-3절).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라는 말의 히브리어 ‘모에드’는 ‘지정, 고정된 때, 계절, 장소, 모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때’이다. 그것은 “노년의 아브라함에게”이다.
“노년”의 ‘자쿤’은 사라가 속으로 웃이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8:12)라고 하였을 때 ‘늙었으니’라는 말 ‘자켄’에서 온 말이다. 그렇다면 ‘자쿤’은 인간에게 어떤 즐거움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육체의 씨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은 육체의 씨가 없는 상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언약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알게 될 때까지 이끌어 오셔서 그때 말씀이 성취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러한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하나님께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않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길게 이끌어 오신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인간의 죄악상을 철저히 폭로하시기 위함이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시는 것도 철저한 나의 죽음 가운데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겉사람은 낡아지나”라고 번역하였는데 ‘디아프데이로’는 ‘파괴하다, 파멸시키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겉사람이 낡아진다는 것은 육체가 늙고 약해진다는 말이 아니라 육신이라는 겉사람의 생각과 정신을 완전히 파괴하고 파멸시키면서 주시는 속사람, 즉 하늘의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날마다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이고 새 생명이다.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4-5절). 팔 일 만에 이삭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이삭이 아들이 된 지 팔 일만이라는 뜻이다. 칠 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한 언약의 완성으로 안식이다. 그 완전한 안식이 이루어져 새로운 날이 되는 것이 “팔 일”이다. 곧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언약에 참여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 세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언약을 보여주는 상징 수이다. “백”이란 땅에서의 완전한 수다. 땅에서 완전함이란 죄인의 죽음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19-22)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6-7절). 조롱하고 비웃었던 사라를 하나님께서 웃게 하셨다. 사라가 스스로 웃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대로 찾아오심으로 웃음, 기쁨의 상태로 만드셨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하늘의 생명에 의해서만 기쁨이 있을 수 있다.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진리와 함께 기뻐”(고전 13:6)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라는 말씀은 자기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얻는 생명을 누리게 되었음을 고백한 것이다(202310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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