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56. 창세기 20:1-18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불편한 진리 2023. 10. 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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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56

창세기 20:1-18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본문에 대하여 그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아비멜렉에게서 극적으로 지켜내셨다는 것으로 우리는 늘 사랑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이해하고자 한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그런 의미만 보여주시기 위해 기록하였겠는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 비슷한 사건을 반복하여 강조하셨겠는가?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사건이 약 25년 전에 애굽에서 있었던 사건(창 12:10-20)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 사건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의 의미를 애굽에서 있었던 사건에서 주는 교훈과 같은 것으로 적당히 취급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 외에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1절). 12:9에서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라고 하였고 13:1에서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라는 말씀에서 “남방”이 “네게브”, 즉 ‘마른 땅’이라는 뜻으로 같은 표현이다. 19장에서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창 19:27-28)라고 하였는데 “눈을 들어”라는 표현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본다’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진리의 눈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육적 입장에서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마른 땅’이지만 그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가데스와 술 사이”라고 하였는데 “가데스”(히, ‘카데쉬’)란 ‘거룩한 곳’을 의미하며, 후에 가나안 땅의 남쪽 경계로 언급된다(민 34:3-6, 수 15:1-4, 겔 47:19, 겔 48:28). “술”(히, ‘수르’)이란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 도망할 때 여호와를 만난 곳이었다(16:7). “옮겨가”라는 말의 히브리어 ‘나사’는 기본적으로 ‘천막의 말뚝을 뽑아내다’라는 어근을 가진 말로 ‘뽑아내다, 출발하다, 떠나다, 여행하다, 버리다’라는 뜻이다. “거류하며”라는 말은 ‘야사브’로 ‘살다, 앉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을 이루실 것을 경험하였지만 여전히 육적 상태에서 거룩과 하나님을 만나는 그 경계 사이에서 “그랄”(히, ‘게라르’), ‘숙박하는 곳’으로 자기 장소로 삼고자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라고 하셨고,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라고 거듭 반복하여 약속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에 대한 종말적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믿음 없음의 상태를 반복하여 보여준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2-3절). 12절에 보면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라고 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보자면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말이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그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자기 생존을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이란 뜻은 ‘왕은 나의 아버지’이다. 그랄 왕 역시 종교인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취하고자 한 것은 두 딸과 동침한 롯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사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언약의 아들을 낳아야 하는 존재이나 아비멜렉은 자기 아내로 삼아 진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자의 전형적인 죄악된 모습이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지켜지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사라, 아비멜렉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 자기 언약이 지켜진다.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바알 바알’이라는 말인데 앞의 바알은 ‘주인, 남편’이라는 명사이고 뒤의 바알은 ‘주인이 되다, 결혼하다’라는 동사이다. 따라서 사라는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이신 하나님과 하나 된 존재라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상태임을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4-5절). 아브라함이 자기 기준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해 놓고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라고 한 모습과 동일하다. 선악의 나무를 취한 죄인들은 언제나 자기 기준의 의와 악을 정해 놓고 하나님의 의와 동일시 하고자 한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비멜렉과 같이 늘 이런 심정으로 교회에 나온다. 우리가 교회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온전한 마음으로 행한 깨끗한 것이라고 내세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죄악이다. 이런 점에서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악인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하늘의 은혜를 입히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6-7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도덕심, 종교성을 인정하고 받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를 막아 범죄하지 않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온전한 마음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것으로 진리를 취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 곧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 때문에 아브라함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꿈”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진리를 드러내시는 수단이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역시 선지자로서 아브라함을 너를 위하여 기도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여기서 “기도”란 히브리어 ‘팔랄’은 ‘중재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대상자로 세우신 자는 아브라함임을 분명히 나타내셨다는 의미이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7-9)

 

모세의 중재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오실 메시아, 곧 언약의 성취자이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진리를 넘겨주는 것이 기도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기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라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고 계심을 보여주셨다. 그 언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2-15)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실 일을 믿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영생을 이루실 것이다. 결국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고자 한 것은 진리를 자신의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행위로 취하고자 한 도둑질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언약 안에서 이루실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리가 되고 의가 되는 것이다.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8-13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에게 이루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하신 언약 안에서만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 일을 통해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사라를 보호하신 하나님을 다시 새롭게 확인한다.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14-16절).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슈브’는 ‘회복되다, 되돌아 오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안에서 교회를 어떻게 회복시키고 돌아오게 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아비멜렉의 관계를 통한 이 에피소드는 단순히 우리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씨라는 것으로 언약의 후손(씨)과 그 언약의 후손 안에 하나 되는 교회를 계시하시기 위함이다.

결국 아비멜렉의 죄는 자기 행위로 진리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을 주신 아브라함을 통해 씨(후손)를 보호하심으로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한 몸으로 이루시는 교회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은 천 개”의 히브리어 ‘케세프’는 속전을 의미한다(민 3:49).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완전한 속전이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17-18절). 아비멜렉에게 “출산”(히, ‘얄라드’)하게 하셨다는 것은 아들 낳는 것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아비멜렉은 자기 행위로 취하려고 했던 진리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주어진 아들, 곧 오실 메시아를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라고 말씀하여 오직 아브라함을 통한 언약의 아들을 강조하고자 하신다(202310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56.2001-18 아브라함과 아비멜렉(2023102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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