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61. 창세기 22:15-24 대적의 성문

불편한 진리 2023. 11. 2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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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61

창세기 22:15-24

대적의 성문

 

“여호와 이레”라는 ‘하나님의 준비하심’과 ‘하나님의 나타나심’에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는가 하나님을 진짜 경외하는가 아닌가 하는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리아 산까지 이끌어 언약을 분명히 증거하시는 사건이다. 그 내용은 후에 모리아 산, 곧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짐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전으로 나타내심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제물에 의해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준비하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대로 이 땅에 오실 것이며 또한 친히 제물이 되신 진정한 언약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주셔서 믿음으로 모리아 산까지 이끌어 오셨던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수양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다는 것은 이삭도 참된 언약의 후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언약의 후손을 보여주는 존재였다. “이레”의 히브리어 ‘이르에’는 ‘라아’의 ‘미완료 3인칭 단수’로 하나님께서 지금 그렇게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15절).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라고 하였기에 여기서는 “두 번째”라고 표현하였다.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증하신다는 의미이다. “불러”라는 말의 히브리어 ‘카라’는 ‘부르다, 선포하다, 드러내다, 선언하다, 부르짖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위한 부르짖음이다. 그 부르짖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하셨다(마 26:36-46, 요 17장).

그러므로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라는 표현은 두 번째 아브라함이 되었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믿음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약속의 땅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믿음으로 이끌어 오신 것의 완성이라는 의미이다. 육의 상태에 있는 첫째 아브라함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 된 두 번째 아브라함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16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라는 표현이 “이르시되”는 ‘아마르’이고 “이르시기를”이라는 말은 ‘네움’(‘신탁, 맡김’)이다.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다는 의미로 쓰인 단어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아마르)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네움)는 의미이다.

“맹세하노니”라는 말의 ‘샤바’는 ‘완전하다, 일곱 번 말하다, 맹세로 자신을 묶다’라는 뜻으로 아브라함과 하나 되어 언약을 성취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행하여”라는 단어 ‘아사’는 ‘일하다, 만들다, 이루다’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순종을 잘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말씀과 하나 되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나 되었고 그 말씀이 이루어내셨다는 의미이다.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미 2절에서 “독자”라고 하였고 12절에서도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독자”를 강조하여 반복하신 것은 이삭이라는 아들이 독자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 언약의 아들을 말씀하시기 위함이다. 구약 히브리어 ‘야히드’(‘단 하나의, 유일한’)는 신약에서 헬라어 ‘모노게네스’로 표현되는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요 1:14, 3:16, 18, 요일 4:9).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안에서 아들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셨음을 나타낸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바라크’는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찬양하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을 향해 ‘저주하다, 욕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왕상 21:10, 13, 욥 1:11, 2:5). 즉 히브리어 안에는 복이 저주가 되고 저주가 복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는 ‘바라크’를 두 번 사용하여 ‘복’을 강조하였다.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씨”(히, ‘제라’)는 단수로 쓰고 있다. 즉 한 씨로 말미암아 많아지고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하늘의 별”(히, ‘코카브’)과 같이 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별”을 어떤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지를 보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7)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새벽 별”과 “하나님의 아들들”을 병행하여 표현하였고, 다니엘서에서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존재로 별로 말씀하였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야곱에게서 한 별이 나온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즉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별”로 나타낸 것이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계 22:16)

 

그렇다면 “바닷가의 모래”(히, ‘홀’)는 무엇을 의미하나?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렘 15:8)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합 1:9)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사 10:22)

 

성경에서 바다의 모래는 많은 사람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수적인 우위를 내세우는 세상적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래와 같은 많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는 “남은 자”만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신 33:19). 히브리어 “모래”라는 명사 ‘훌’(H2344)은 동사 ‘훌’(H2342)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괴로워하다, 고통을 당하다, 근심하다’라는 뜻이다. 동사 ‘훌’이 사용된 용례를 보면 신명기 2:25에서는 “근심하니라”라고 하였고, 욥기 15:20에서는 “고통을 당하며”라고 표현하였다. 즉 “바닷가의 모래와 같고”라는 말씀은 후손이 번성하여 많아질 것이지만 그것은 곧 고통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대적의 성문”은 누구인가? 한마디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복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저주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후손이 많을지라도 그들은 결국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 있는 자들에게 고통이 되고 대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후손, “네 씨”가 “성문”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7-18)

 

우리 성경에는 “음부의 권세”라고 번역하였는데 “권세”라는 말 ‘퓔레’는 ‘문’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원수가 되는 음부의 문을 차지함으로 문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 세워진 교회이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18-19절).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20절). “이 일 후에”란 ‘다바르’로 말씀을 주신 것 안에서 이루어진 일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개되는 족보는 단순히 혈육을 소개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21-24절). 하란에서 일어난 아브라함의 형제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고 있다. 여기서 남자만 언급되는 계보에서 이 족보를 언급한 이유는 여자 “리브가”에 대한 배경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의도적으로 아브라함 생애의 대단원을 마무리 짓는다는 측면에서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에 대한 이야기를 연결시키려고 하나님의 은밀한 언약적 일하심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브두엘이 리브가를 낳았다는 것이다. 창세기 23장에 가면 사라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어서 리브가의 등장을 제시함으로 여자 상속자 문제의 세대교체를 보여 준다.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가 이삭이라면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사라의 상속자는 리브가이다. 창세기 12-22장까지가 남자 쪽의 상속자 문제를 다룬 것이라면 22:20-24장까지는 여자 쪽의 상속자 문제를 다루었다.

 

 

(202311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61.2215-24 대적의 성문(202311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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