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50. 창세기 17:15-27 언약의 이름

불편한 진리 2023. 8. 1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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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50

창세기 17:15-27

언약의 이름

 

할례 언약을 말할 때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은 왜 이스마엘까지 할례를 받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육체의 자손이요 율법의 아들이라면 할례 언약에서 제외되어야 맞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할례 언약을 받았다는 것 자체를 구원과 직결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16:10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라는 말씀이 단순한 약속이 아닌 것을 생각했었고, 하나님께서 할례 언약을 주신 것은 단순히 육체의 생식기 포피를 잘라냄으로 그것을 행위로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마음의 할례를 명하신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게 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시면서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4절)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5절)라고 “아브람”이라는 ‘고귀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이라는 ‘무리의 아버지’로 바꾸어 주셨다.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는 것은 단순히 이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뜻이다. 무엇이 그렇게 한다는 것인가? 그것을 4절에서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을 그렇게 이끌고 가시겠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이 무리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이 그렇게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능력, 의지를 이름에 담아 주셨다.

하나님은 이것을 더욱 분명히 하시기 위해 사래의 이름도 바꾸어 주신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15-16절). “사래”(히, ‘사라이’)라는 ‘왕비, 여지배자, 여주인’에서 “사라”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 바꾸셨다. 여기서도 “여러 민족”이란 ‘고임’(‘고이’의 복수) 이방 여러 나라를 포함하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그 “민족의 여러 왕”이 사라에게서 나올 것이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이라는 경계를 넘어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언약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의미를 다시 반복하신 것이다. 두 번이나 이름을 바꾸신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기억하시고 이루실 것이라는 강조이다. 이런 점에서 “이름”(히, ‘솀’))이란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언약의 이름이다.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6)라고 하였는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입으로 ‘여호와’라고 불렀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안 되면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이름이 없는 분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 들어가 하나 되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존재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노아 홍수 이후 셈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언약을 주셨다.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6-27)

 

여호와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셔서 셈(이름)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기로 하셨다. 셈의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시면서 ‘이름의 여호와’가 되시는 것을 보여주셨다. 셈의 장막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막에 셈이 거하게 된 것이다. 셈의 후손을 통해 이름을 드러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라고 하셨는데 사라가 낳는 아들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면 이미 있는 아들은 아들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약이 담기 궁극적인 아들은 이 땅에 이름을 가진 존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이름이 된다(마 1:21, 행 4:12). 구원의 이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그 이름이 된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행 2:21). 이런 점에서 성도에게는 자기 이름이 없다. 자기 이름이 없기에 자기 인생이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영접하는”의 헬라어 ‘람바노’는 ‘취하다, 받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받은 자는 “믿는 자들”이다. 우리 성경에 “자녀”라고 번역하였는데 ‘테크논’은 ‘자식, 자손, 아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됨은 인간의 혈통이나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7-8)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7-18절). “엎드려”의 히브리어 ‘나팔’은 ‘떨어지다, 죽다, 실패하다’라는 뜻이고, “웃으며”라는 말의 ‘차하크’는 ‘웃다, 비웃다’라는 뜻인데 우리 성경은 19:14에서는 “농담”으로, 39:17에서는 “희롱”으로, 출애굽기 32:6에서는 우상 앞에서 “뛰놀더라”라고 번역한 단어이다. 아브라함의 믿음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언약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 생활을 율법적인 행위를 하였던 것이 우상 앞에서 뛰어놀았던 것이며, 언약의 말씀에 대한 웃음이고, 조롱이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99세의 아브람이라는 뜻이다. 99세의 아브람에게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존재이고 100세의 아브라함은 언약의 자식이 주어지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아브람, 즉 죽은 존재에게서 생명의 아들을 나오게 하신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에는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죽음 안에서 생명을 이루시는 분이 전능한 하나님이다(엘 샤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아브라함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9절). “아니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아발’은 ‘확실히, 참으로’라는 뜻이다(참고 삼하 14:5, 왕하 4:14).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선언이다. 그래서 또 이름을 주신다.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라고 하셨는데 ‘웃음, 조롱’의 ‘이츠하크’는 ‘차하크’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비웃으며 조롱한 이름을 주셨다. 언약에는 인간의 조롱, 믿음 없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의 조롱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이다. 그러기에 말씀에 굴복된 자가 복음을 드러내면 세상은 복음을 조롱하며 농담으로 여긴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20절). “열두 두령”(개역한글판에서는 “열두 방백”이라고 번역하였다)이란 히브리어 ‘나시’는 ‘들어 올려지다, 군주, 지도자, 구름, 안개, 수증기’라는 다양한 뜻이 있다. 이스마엘이 군주, 지도자가 되지만 그것은 안개요 수증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이지만 세상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언약의 아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조롱 안에 이미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언약의 아들이 오면 그 안에서 진리로 생육하고 번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26-27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육체의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이스마엘로 시작하여 이삭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육체에 있는 자를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할례로 생명 안에 포함될 것을 보여주신 계시이다. 그것이 언약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한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2-19)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9절)라고 하셨고 또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21절)라고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분명히 이루신다는 것을 이삭과 언약을 세우실 것으로 말씀하신다. 언약은 아브라함의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증거가 아니라 아들 이삭과 언약이 이어져 하나의 후손(씨)가 이 땅에 오는 것이다(갈 3:16). 그래서 불가능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신 언약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영원한 언약”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22절). “떠나”라는 히브리어 ‘알’은 ‘~위에, ~을 넘어서, ~에 대하여’라는 전치사와 접속사로 쓰이는 단어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직역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 위로 오르셨다’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 위에 계속 머물러 계시며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23-25절).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이 말씀대로 실천하였다는 의미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언약대로 어떻게 이끌고 계신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포피를 벤 때 “구십구 세”였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가야 하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99세에 받은 할례는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죽고 언약의 말씀 안에 있게 되는 100세로 나아간다. 이스마엘이 “십삼 세”였다는 것은 ‘10’이라는 완전을 향해 ‘3’이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이끌려 가야 한다. 단순히 육체의 할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으로 성취하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로 거듭남이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준다. 바울 사도가 육체의 할례를 받았으나 교회를 핍박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이르게 된 것처럼 말이다(빌 3:4-9)(202308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50.1715-27 언약의 이름(202308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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