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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48
창세기 16:1-16
아브람이 낳은 이스마엘
오늘날 교회들이 중동 전쟁의 원인을 아브라함의 실수로 낳게 된 이스마엘로 보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나쁘게 본다. 만약 그렇다면 10절에서 하나님께서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라고 하셨는데 이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본문을 단순히 아브람 실수로만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설교가 ‘믿음은 기다림’이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그러면 아브람의 잘못이 무엇인가 하는 측면에서 본문에 접근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아브람이 믿음 없음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이끌려 온 존재였음을 확인하였다. 아브람은 죽은 존재로 드러나고 언약은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 홀로 이루시는 것임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하나님 자기 죽음으로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아브람의 죄성은 믿음의 상태로 철저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 역시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3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라고 하였고 16절에서는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라고 하였다. 80세가 넘어서면서 더 시간이 지체된다면 후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어쩌면 사래는 자식이 없으므로 종을 통해 자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관습으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1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데라의 톨레도트를 시작하면서 아브람에 대한 기록에서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라는 말씀을 이미 선언해 놓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다시 그것을 언급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아내 사래가 출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아직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두된 인물이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다.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면서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라”(15:13)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얻은 하갈을 통해 언약과 연관하여 주어지는 계시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히브리어 ‘하가르’는 ‘이주하는, 도망하는’이라는 뜻이다. 아브람의 후손이 이방을 섬기는 그것을 아브람이 애굽의 여종 하갈에게 어떻게 도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즉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방법을 하갈에게 두고 있다는 뜻이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2절). 사래는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하였다. 히브리어 ‘아차르’는 ‘억제하다, 못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못하게 하셨다고 사래는 불만을 아브람에게 말한다. 아브람이 15:3에서 “주께서 내게 씨를 주시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한 것이나,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표현이다. 인간의 죄성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합당한 이유,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3절). 여기서 “데려다가”라는 표현 ‘라카흐’는 ‘취하다’라는 뜻이고 “준 때”라는 말에서 ‘나탄’은 ‘주다, 세우다,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 말씀과 함께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2절)라는 표현은 에덴동산에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히, ‘라카흐’)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히, ‘라탄’) 그도 먹은지라”(창3:6)라는 말씀과 같다.
“들어가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보’는 하나 되는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하갈은 아브람이 먹을 수밖에 없는 선악의 나무이다. 따라서 아브람이 하갈과 하나 되는 것은 자기 행위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고자 하는 율법적 행위이다. 그래서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히, ‘에세르’)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10년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열’이라는 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의 완전함을 드러내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언약이 지향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실체가 오시면 율법 아래에서 죽음으로 죄를 속량하시는 언약을 성취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4-5절). “멸시”란 말의 ‘멸’은 히브리어로 ‘칼랄’인데 ‘하찮다, 시시하다, 보잘 것 없다, 가볍다, 빠르다’라는 뜻이고, ‘시’는 ‘아인’인데 ‘눈, 샘’이라는 뜻이다. 하갈은 옛 언약 곧 율법과 그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즉 율법의 행위는 복음의 은혜를 가볍고 하찮은 것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아브람이 자기 행위로 이루고자 하는 결과물로 율법의 열매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전했다.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24-31)
그래서 사래가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라고 하였다. “모욕”이란 히브리어로 ‘하마스’인데 ‘폭력, 난폭, 부당행위, 불법, 악’이라는 뜻이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에게 당하는 폭력, 그 죄악은 언약의 대표자 아브람이 받아야 한다. 하갈의 폭력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약의 후손이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에서 “판단”이란 ‘샤파트’인데 ‘재판하다, 다스리다, 통치하다’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판단되어 왕으로 다스리심이 온전히 성취된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6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라는 말씀에서 ‘토브’를 쓰고 있다. 하갈의 눈은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은혜의 복음을 하찮게 보는 눈이었다. 그러나 사래의 눈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은혜와 진리의 복음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학대하였더니”라는 말은 ‘아나’인데 ‘아나브’(가난한, 겸손한, 온순한, 비천한)에서 유래한 단어로 ‘낮추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너를 낮추시며(히, ‘아나’)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이스라엘은 낮추어져야 하나님의 말씀만 드러난다. 민수기 12:3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온유함이 ‘아나브’이다. 이 ‘아나브’의 헬라어 역어가 ‘프토코스’, 즉 ‘절대적인 가난’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헬, ‘프토코스’)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하셨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7절). “사자”란 ‘말라크’인데 단수로 표현하고 있고 “만나”라는 말은 ‘마차’인데 만나야 할 자를 만났다는 뜻이다. 즉 하갈이 만나야 할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율법에 매인 자는 진리를 벗어나고 도망하고 싶어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는 물음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3:9),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4:9)라는 물음과 같은 것이다. 비록 율법에 매인 바 되었지만 그 죄를 속량하고 구원과 생명을 이루시는 진리, 복음이 주어져야 한다. 그래서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10절)라고 말씀하셨다. 즉 진리로 충만해지는 것이 사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9-11절).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라고 3번 반복해서 표현하였다는 것은 강조한다는 뜻이다.
“이스마엘”은 ‘이쉬마엘’은 ‘샤마’(‘듣다, 순종하다’)라는 말과 ‘엘’의 합성어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이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들어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행위로 이루는 순종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하갈의 고통을 들으심으로 아브람을 통해 언약을 이루실 것을 하나님 자신의 순종으로 이루시겠다는 언약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12-14절). 자기 행위로 언약을 이루려는 율법적 행위는 늘 대적자의 상태가 되어 그 죄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브엘라해로이”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살피셔야 한다. 그 실피심이 십자가이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15-16절). 이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 언약이 드러남으로 아브람의 자기 행위로 언약을 이루려는 율법적 의라는 죄성이 드러난다. 그래서 오직 언약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이끄신다(202307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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