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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51
창세기 18:1-15
언약의 아들
본문을 가지고 쉽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여 복을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우리도 그렇게 나그네를 대접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자 한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불우이웃돕기가 마치 천사를 대접하는 것과 같으며 그것이 곧 구원의 지름길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말씀을 할 때는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파악하고 어떤 관점에서 말씀하는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1절). “마므레”는 ‘강함’이라는 뜻이다. 13장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8)라고 말씀한다. 롯과 헤어진 후 거주하게 된 곳이 “헤브론이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이다. “헤브론”은 ‘연합, 동맹’이라는 뜻이다.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창 12:6)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거주하게 되었던 곳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였다. “모레”란 ‘(이른) 비’(시 84:6, 욜 2:23), ‘교훈’(욥 36:22), ‘가르치는 자’라는 뜻이다.
“상수리나무”는 히브리어로 ‘엘론’(알론)인데 ‘엘라(알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어 성경에는 주로 ‘엘론’(알론)은 도토리 열매가 열리는 ‘참나무’(oak)로 번역하였으나 ‘엘라’(알라)는 ‘테레빈나무’(terebinth)로 표현하였다. 주로 우리 성경에는 거의 다 ‘상수리나무’로 번역하였는데 딱 한 군데 호세아 4:13에서는 ‘알론’을 ‘참나무’, ‘엘라’를 ‘상수리나무’로 번역하였다.
아모스 2:9에 보면 “강하기는 상수리나무(알론) 같으나”라고 하여 ‘강하다’라는 이미지가 있다. 또한 이사야 6:13에서는 “상수리나무(알론)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라고 하여 이스라엘을 지칭하며 ‘남은 자’에 비유하였다(참고 1:29-30). 이렇게 볼 때 성경에서 ‘상수리나무’(참나무)는 강한 하나님, 진리로 상징되어 남은 자를 지칭하는 나무로 나타낸다.
그러나 사사기에 보면 “가알이 다시 말하여 이르되 보라 백성이 밭 가운데를 따라 내려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을 따라 오는도다”(삿 9:37)라고 하였는데 “므오느님”(원형 : ‘아난’)은 히브리 음역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점을 치다, 마술을 행하다’라는 뜻이다. 후에 이스라엘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음행을 하여 우상 숭배하는 모습을 드러내었다(사 57:5, 겔 6:13, 호 4:13 등).
이렇게 보았을 때 성경에 “상수리나무”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위치를 말하거나 지나가는 말로 어떤 한 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안에서 진리를 나타내시는 나무로 보여주는 면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자에게는 우상 숭배의 나무로 나타내고 있다.
“장막 문”에 있었다는 것은 할례 언약 이후 아브라함 입장에서 나름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부르셔서 이른 비의 은혜를 내리셔서 말씀을 가르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아브라함을 이끌어 가나안 족속들과 함께 우상 숭배하는 것에서 벗어나(실제 아브라함은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면서 아모리 족속 마므레 동맹을 맺고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모습이었다. 참고 14:13) “마므레 상수리나무”에 나타나심으로 헤브론의 뜻 그대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남은 자로 강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절). “사람 셋”이라고 하였는데 19:1에 보면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라고 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천사로 나타내고 있으나 1절에서 “여호와께서 …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라고 말씀하였기에 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1, 10, 14절).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어떤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1-2)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란 아브라함과 롯을 의미한다. “손님 대접”이라는 말의 헬라어 ‘필록세니아’는 ‘낯선 사람(나그네)에 대한 환대, 사랑’이라는 뜻으로 나그네를 대접하였다는 것을 형제 사랑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였다. 율법에 의하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 22:21)라고 하였고, 또한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9)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에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것은 나그네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말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으로 그 나그네 안에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나그네로 오신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37)라고 답변하였다. 히브리서 표현대로 의인들은 “부지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접하다”라는 말의 헬라어 ‘쉬나고’는 ‘(결혼으로) 결합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나그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찾아오신 하나님을 자기 의지로 대접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연합된 것이다.
그래서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3-8절).
“세 스아”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스아’는 약 7ℓ이다. ‘한 오멜’이 한 사람이 하루 먹을 수 있는 분량으로 약 2ℓ이다(출 16:16). ‘열 오멜’이 20ℓ로 한 에바이다(출 16:36). 그렇다면 “세 스아”는 ‘한 에바’와 같은 것이다. 신약에서의 표현은 ‘서 말’이다(마 13:33).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삿 6:19)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삼상 1:24)
한 에바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양이었다고 본다면 아브라함이 준비한 “세 스아” 역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제사로 말미암아 언약의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함께 나누는 화목 제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과 연합되어 화목이 이루어진 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0절)라고 하셨도 또 14절에서도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4절)라고 확인시켜 주셨다. “내년 이맘때”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카에트 하야’를 직역하면 ‘생명의 때’라는 말이다. 아들 이삭을 낳는 것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롬 9:7-9)
여기서 “명년 이 때”라고 번역하였는데 ‘특별한 때’라는 말이다. 아들을 낳는다고 다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 특별한 때, 창세기의 표현대로 하자면 생명의 때에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약속의 아들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겠다는 것은 아브라함 때에는 아들 이삭을 주시는 것으로 찾아오셨는데 그것은 곧 언약의 성취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갈 4:4).
9절에서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9절)라고 하였고, 또 10절에서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10절)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11절)라고 분명한 사실을 밝힌다. 성경이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느냐 하면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절)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사라의 믿음 없음을 철저히 폭로하신다. “노쇠하였고”라는 말의 히브리어 ‘발라’는 ‘늙다, 닳아 해어지다, 쇠약해지다’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주로 하늘과 땅을 대조하는 차원에서 쓰인 단어이다(사 50:9, 사 51:6, 시 102:27). 이런 점에서 “늙었고”(11절), “늙었으니”(12절)의 히브리어 ‘자켄’은 ‘늙은, 오래된, 옛날(사람)’이라는 뜻으로 믿음 없음의 옛 사람인 것을 고백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3절)라고 하시며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절)라는 말씀은 믿음 없음을 다시금 폭로하시면서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4절)라고 확인시켜 주셨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팔라’는 ‘놀라운 일’을 볼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놀라운 일이란 언약의 성취이다.
그들의 이런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거듭 아들에 대한 약속을 확인시켜 주셨다. 이는 아들을 줄테니까 제발 믿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비웃음, 믿음 없음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가능한 그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들이 무력화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성도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하나이다. 아들을 주시는 것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러 가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의 권세에 매인 이 땅의 상태는 심판의 대상으로 죽음 가운데 있으나 그 안에 생명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시다(2023090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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