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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47
창세기 15:8-21
아브람과 세우신 언약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가를 표현한 것이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7절)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하여 아브람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말씀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신다.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절)라는 말씀은 아브람이 스스로 믿음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아브람 입장에서 더 분명한 확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대를 신뢰하고 더욱 의지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는 그런 믿음은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알고 계셨기에 자기 언약으로 어떻게 이끌고 가시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자 언약을 맺으신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9절).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셨는데 히브리어 ‘레’는 ‘~에 대하여, ~에 관하여, ~에게, ~안에, ~으로부터’라는 다양한 뜻이 있다. 아브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에 관하여’ 주시는 언약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을 언약을 대상자로 세워놓고 언약을 맺으시지만 아브람과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 자신을 위한 언약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경에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샬라쉬’는 숫자적인 표현이 아니라 동사로 ‘세 번째로 행하다, 세 배로 하다, 강화하다’라는 뜻이다(“년”이라는 말은 없다). 구약에서 9번 나오는데 “세 구역”(신 19:3), “사흘 동안”(삼상 20:19), “세 번째”(왕상 18:34), “세 겹 줄”(전 4:12), “삼층”(겔 42:6) 등으로 번역하였는데 세 번째 혹은 강화하고 더욱 분명히 한다는 의미로 표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 일만의 부활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의 완전한 일하심에 의한 언약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또한 우리 성경에 “암소”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에글라’는 ‘암송아지’이다(삼 년을 숫자로 보았기에 암소로 번역한 것이다. 삼 년이 되었다면 송아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암염소”는 히브리어로 ‘에즈’인데 ‘강하다’라는 말의 ‘아자즈’에서 유래한 단어이고, “숫양”은 ‘아일’이다. 즉 암송아지와 같이 씨 없이 약하고 어린 존재, 힘 있다고 하지만 씨 없는 암염소, 씨가 있다고 착각하는 숫양 이 모든 제물은 죽고 쪼개져야 할 존재를 상징한다.
또 “산비둘기”의 ‘토르’는 우리 성경에 ‘산비둘기’ 혹은 ‘멧비둘기’(시 74:19)라고 번역하였는데 제사 제도에서 가난한 자의 제물로 규정되었다(레 5:7, 12:2 등). “집비둘기 새끼”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고잘’은 ‘새끼’라는 뜻이다(참고 신 32:11). 쪼개지는 동물들 외에 쪼개지지 않는 비둘기로 영적인 의미가 더해져야함을 보여준다. 비둘기 같이 임하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은혜가 임하여야 하나님의 언약다운 언약이 된다. 그래서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10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진리로 드려지는 것은 온전한 하나로 드려지는 것이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10절). “그 중간”이란 히브리어로 ‘타웨크’인데 ‘중앙, 한가운데’라는 뜻이고, “쪼개고”라는 말은 ‘바타르’로 ‘부분, 조각’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일반적으로 계약을 맺는 방식이다. 상호 계약을 맺는 당사자가 쪼갠 동물 사이를 지나감으로 계약을 어기면 동물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고 계약은 깨어졌음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이 방식을 하나님은 차용하여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라는 표현 속에 우리 성경에 번역하지 않은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쉬’(남자, 사람)라는 단어이다. “쪼갠 것”이 ‘이쉬 베테르’인데 그 쪼갠 것은 분명 동물의 암수인데 남자,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쉬’는 동물의 암수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 표현을 통해 구약의 모든 제물은 암수를 막론하고 ‘이쉬’, 즉 ‘씨 가진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씨 가진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쪼개짐의 죽음을 이루셔야 한다는 의미를 제물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쪼개진 것이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이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이요 생명이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1-23)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11절). “솔개”의 히브리어 ‘아이트’는 ‘맹금류’(독수리, 매 등)를 의미한다.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맹금류는 가증한 것이다(레 11:13).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에 가증한 것이 덮혀질 수 없다. 그래서 “쫓았더라”라는 말의 ‘나샤브’는 기본적으로 ‘불다’라는 뜻인데 다른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나샤브) 물이 흐르는도다(시 147:18)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나샤브)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7)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어 말씀이 임하게 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이 솔개를 쫓았다기보다 하나님께서 말씀이 임하여 자기 언약을 분명히 보여주신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결코 믿음 없음의 존재이고 아브람에게 주어진 의가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해야 했다. 아브람이 이루는 언약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12절)라고 말씀하여 단순히 해질 때 아브람이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기에 믿음 없고 의가 아닌 아브람은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셨듯이 아브람을 잠들게 하심으로 죽음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13-16절). 출애굽은 이미 아브람이 경험한 사건이다. 아브람의 후손 이스라엘이 겪어야 할 구원의 모형이다.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은 죄의 권세에 매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데라가 205세까지 살았던 것을 보면 아브람이 육체적으로 장수하였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육체적인 장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누리는 생명을 표현한 것이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라는 표현은 죄가 어떤 일정한 양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을 심판할 근거를 마련하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은혜로 이끌어 믿음을 주시는 일하심이 없다면 모든 인간은 죄악 가운데 내버려두심의 상태에 있는 것인데 그 상태에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고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17-21절). 어두움이 임하는 것으로 빛이신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연기 나는 화로”란 ‘아샨’은 ‘연기, 먼지, 노여움’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진노로 표현된다. “타는 횃불”란 히브리어 ‘랍피드’는 ‘라파드’(빛나다, 비추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출애굽기 20:18에서는 “번개”로 번역하였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으로 모든 진노와 심판을 홀로 스스로 받으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 언약은 철저히 하나님 자신이 책임지시는 언약이다. 그래서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고 하나님만 지나가시는 것으로 보여주신다.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 언약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죽음으로 저주를 짊어지시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담보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언약은 이 언약을 위해 희생된 자가 없으면 성취가 불가능하다. 그 희생도 하나님 편에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세우신 언약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과 아브람과 세우신 언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세우신 언약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새 언약의 죽음이라고 밝히셨다.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8-20)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15-22)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세우신 언약은 아브람을 믿음으로 이끄시고 언약 안에 두시기 위함이다. 이 언약에 의해 언약 밖에 있는 자 아모리, 애굽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이루어져 죄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 무엇이며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은혜이다(202307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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