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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44
창세기 14:1-16
아브람의 전쟁
아브람에 대해 계속 말하지만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믿음으로 출발한 인생이 아니었고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도 결코 믿음으로 살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오늘 본문에 대해서도 아브람은 318명의 가신을 데리고 네 연합군을 물리치고 조카 롯을 구해왔다는 대단한 믿음을 말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에 대해서 너무 좋은 믿음으로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어떻게 이끌고 계시는가를 보여준다.
아브람과 롯이 함께 거할 수 없는 땅이었기에 롯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한 곳’,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곳’으로 선택하여 떠났다. 이 과정에서 아브람이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9)라고 한 말이 결코 믿음의 발언이 아니라 은근슬쩍 롯이 요단 지역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선택해서 가고 싶었던 믿음 없음의 상태였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롯이 선택한 곳은 단순히 풍요로운 곳이 아니라 에덴의 동편과 같은 곳이었고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으로 간 것과 같은 ‘동쪽’이었다.
하나님은 애굽의 재물을 이용해 롯을 언약에서 배제하고 아브람을 ‘동맹, 연합’이라는 뜻을 지닌 ‘헤브론’으로 이끄셨고 ‘제단’(히, ‘미즈베아흐’)을 쌓게 하심으로 ‘죽이는 장소, 죽음이 담기는 곳’의 의미를 보여주심으로 다시 언약을 확인시키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죽음으로 아브람과 연합되어 있음을 언약으로 재확인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애굽 사건과 출애굽 사건을 통해 아브람으로 하여금 ‘후손’(씨)과 ‘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약을 확인하도록 이끄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전쟁 이야기가 나온다. 이 본문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이겼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롯이 세상적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본문도 아니다. 만약 이렇게 보면 인간의 행위로 오는 인과응보의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반대로 아브라함은 자기 선택으로 얻은 복인가? 인간의 어떤 행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아니라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 중심이고 그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과정에서 인간의 믿음 없음이라는 죄가 폭로된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1-2절). 우리는 여기에 기록된 나라(부족)의 위치나 왕의 이름 등, 그 내용을 다 알 수 없으며 굳이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정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명이나 나라를 다 알 수 없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날”이라는 지명이다. 함의 아들 중에서 “니므롯”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존재로 ‘강한 자’였는데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겔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10:10)라고 한 말씀을 볼 수 있었다. 즉 아브람이 처음에 거주하였던 갈대아 우르 지역의 바벨론이다.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3-7절). 소돔과 고모라로 대표되는 다섯 나라가 바벨론 지역의 네 나라를 섬기다가 배반을 하였기에 엘람의 그돌라오멜 왕을 중심으로 네 나라가 요단 지역까지 치고 들어왔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8-11절)라고 하였는데 중요한 것은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12절)라는 말씀이다. 이 일로 인하여 아브람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13절).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기에 이 전쟁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7절에 보면 네 나라가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맹”이란 우리 말로는 한 단어로 표현되었지만 히브리어로 ‘바알 베리트’이다. ‘바알’이란 ‘주인, 소유주, 남편’, ‘베리트’는 ‘계약, 언약’이라는 뜻이다. 즉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을 주인으로 삼는 언약이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아브람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히브리어로 ‘이브리’는 셈의 후손 중 ‘에벨’(10:21-24)에서 유래한 말로 ‘다른 편에서 온 자, 저 편에서 온 자’라는 뜻으로 ‘강을 건너온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후에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모리 족속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3-16)
아모리 족속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죄인이었고 그 죄악이 가득 찰 때 심판하시겠다는 심판의 대상이었다. 그런 아모리 족속을 아브람은 주인으로 삼고 언약을 맺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헤브론으로 이끄시고 제단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실 언약임을 보여 주셨지만 아브람은 현실적으로 아모리 족속이 더 크게 보였기에 주인으로 삼는 언약의 관계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이 믿음이 있었다고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없이 아모리 족속과 하나 되는 현실적으로 죄악 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14절)라는 표현이다. “거느리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루크’인데 ‘비우다, 뽑다’라는 뜻이다. 칼이나 창을 뽑는(빼는) 것을 가리킨다. 즉 무기를 뽑아 들고 전쟁에 임하였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참고 출 15:9, 레 26:33, 겔 5:2 등). 물론 318명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니 대단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이 의지한 것은 아모리 족속을 주인으로 삼는 동맹이었고 또한 무기를 장착한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묘사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집에서 길리고”라고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어 ‘얄리드’는 ‘얄라드’에서 유래한 말로 ‘태어난, 출생한’이라는 뜻이다. 아브람이 의지하는 것 또한 자신의 집의 것, 자신이 길리운 것에 있었다는 말씀이다. 전쟁 이후 언제인지 모르지만 한참 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하신 말씀과 아브람이 한 말을 보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창 15:1-3)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은 북쪽 네 나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온 이후에 그들의 공격이 다시 있을지 몰라서 아브람이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본문의 문맥에서 아브람이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라고 하면서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아브람의 두려움은 네 연합군의 재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고 하지만 아브람은 아모리 족속과의 동맹을 더 중시하고 있었고 언제까지나 그들을 섬기고 있을 수는 없고 후손이 생겨 그들과 대등한 관계가 속히 되어야만 한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탄’이다. 3:12에서 아담이 선악과의 나무를 취한 원인을 “하나님이 주셔서”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나탄’이다. “주지 아니하셨으니”라는 하였으니까 ‘로 나탄’이다. 우리들의 불만은 하나님께서 주셔도 문제이고 안 주셔도 문제를 삼는 죄성이다. 적어도 약속하셨으면 빨리 주셔야 하는데 안 주셨으니 아브람 입장에서 적절한 제안으로 하나님과 타협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은 하나님께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 집에서 길린 자”라고 하였다. 우리 성경에 “길린 자”라고 번역였는데 히브리어로는 ‘벤’, 즉 ‘아들’이라는 말이다. 엘리에셀을 하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얻게 되었는지 아니면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15절)라고 하였을 때 다메섹에서 사로잡은 자 중에서 집에 와 낳은 아들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브람은 집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 집의 아들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방식대로 이루고 싶었다. 그 자기 방식이란 자기 집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12:1)라고 하셨는데 아버지의 집은 떠났을지 모르지만 자기 집은 떠나지 못하고 자기 집의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16절)라는 말씀은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을 주인으로 삼고 언약을 맺은 결과요 또한 자기 집을 철저히 의지한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후손에 대한 불만을 하나님께 토로함으로 가나안 땅에서 아모리 족속과 맺는 언약이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아브람의 믿음의 상태를 성경은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하지만 세상의 것, 내 집의 자식을 힘으로 삼고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2023061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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