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43. 창세기 13:1-18 아브람의 출애굽

불편한 진리 2023. 6. 11. 17:17

https://www.youtube.com/live/bVjTY9Xb024?feature=share 

 

 

창세기 강론 43

창세기 13:1-18

아브람의 출애굽

 

아브라함의 출발이 믿음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에 오늘 본문도 롯에 대해 관대하여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는 표현이 아브라함의 대단한 믿음으로 설교 된다. 그러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믿음이 좋았다가 또 한 순간은 타락한 것의 반복된 상태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어느 순간에는 믿음이 있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타락했다는 의미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어떻게 아브라함을 이끌고 계신가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이란 내가 무엇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루심이다.

애굽으로 갔던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사래의 일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심으로 아브람은 아내를 다시 얻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바로는 세 번이나 같은 표현을 하였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12:18-19).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바로가 하나님의 재앙으로 인해 아브람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12:20에서 “보내었더라”라는 말 히브리어 ‘샬라흐’는 ‘쫓아내다’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1-2절)라는 표현은 아브람의 출애굽이 아브람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후에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시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많은 재물과 은금을 얻어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다(출 12:35-36).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브람 입장에서는 애굽에 더 거할 수 없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브람이 돌아온 곳은 “네게브”, 즉 ‘마른 땅’이었다. 그러나 다시 애굽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3-4절)라고 하였다. “벧엘”은 애굽에 내려가기 전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곳이다(12:8). 아브람의 출애굽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신 곳은 ‘루스’였다. 28:19에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야곱 때에 비로소 벧엘이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람의 출애굽으로 “벧엘”에 이르렀다고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 되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입히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5-7절).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 그 땅이 얼마나 좁은 땅이기에 롯과 함께 살 수 없는 땅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더구나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더더욱 같이 뭉쳐야 되지 않나?

그래서 흔히 이 말씀을 가지고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있으므로 믿는 자들이 그들에게 다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많이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람이나 롯이 믿음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죄악상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당시에는 자신이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재산이 많을수록 또 식구가 많을수록 안전한 것이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온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롯과 함께 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과 롯이 결별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아브람이 롯에게 헤어지자고 제안한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9절).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자들이 아브람의 믿음이 대단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그렇게 대단한 믿음의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는 표현은 오히려 아브람의 죄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가나안 땅의 위치에서 오른쪽은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0절)라고 하였다. 만약 아브람이 이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면 롯과 당연히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아브람이 먼저 좌를 선택했어야 그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브람은 마치 롯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말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은근히 조카 롯이 좌를 선택한다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요단 지역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아브람의 죄악성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아브람의 모습이 바로 믿음을 가장한 우리의 죄악상이다.

“나를 떠나가라”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은 히브리어로 ‘파라드’인데 노아의 후손들이 “나뉘었더라”(10:5, 32), 야곱과 에서가 “나누이리라”(25:23)라고 하였을 때 그 표현이다. 즉 언약 백성과 아닌 자를 나누신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롯을 떠나보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라는 말씀은 약속의 땅이 롯을 제외하고 아브람만 용납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라는 말씀은 아브람이 애굽에서 얻은 재물이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얻은 재물을 이용하여 아브람과 롯을 갈라놓으시는 계기로 삼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재물을 이용하여 언약에서 롯을 제외시키고 아브람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가실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11-13절). 가나안 땅으로 와서 기근을 경험했던 롯의 입장에서는 우선적으로 물이 넉넉한 곳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롯이 택한 것은 단순히 요단 지역, 물이 넉넉한 곳이 아니라 “동으로 옮기니”라는 표현으로 보여준 것처럼 ‘동쪽’이었다. 가인과 같은 모습으로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4:16)으로 행하였다. 하나님을 멀리 떠남으로 스스로 “여호와의 동산”, “애굽”을 취하는 쪽으로 갔다. 여호와의 동산 같은 곳을 취하는 것이 선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죄악이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가기보다 하나님을 떠나 여호와의 동산을 쟁취하려는 자기 행위의 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롯은 아마도 처음부터 소돔에 살게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요단 온 지역을 택하였고, 동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하였고 후에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2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소돔 성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아브람을 떠난 롯은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그렇게 그 영향력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이나 평안이 아니다. 롯의 눈에 보인 것은 외적으로 풍부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인들은 많은 교인, 풍부한 재정, 대형 예배당(그들 말로 성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의 박사학위는 마치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것처럼 여기고 그저 훌륭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고 싶어 한다.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있느냐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 없이 말이다.

외형적인 것만으로 좋다고 여기는 롯의 시각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나면서부터 맹인이다. 우리는 항상 외형만 보고 스스로 탐욕의 자리에 자신을 몰아넣기를 좋아하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9-41)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4-17절). “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라는 말은 만약 셀 수 있다면 셀 수 있을 만큼의 자손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롯이 떠난 후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다. 아니 하나님께서 롯을 떠나게 하신 후 아브람에게 언약을 확인시키신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다시금 롯 사건을 통해 땅 문제를 좀 더 구체화시키신다. ‘누가 뭐래도 내가 약속한 땅이 바로 이 땅이다. 현재 다른 누가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 땅이다’라고 못 박으셨다.

결국 아브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을 차지하느냐 무엇을 얼마나 많이 쌓아 놓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안에 있느냐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단순히 롯과의 땅 싸움의 차원이 아니라 애굽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인, 아브람 자신의 죄악성으로 인한 실체, 12장에서 주어진 약속의 재확인과 구체화라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롯과 함께가 아니라 아브람만, 그리고 아브람을 통해서만 이루실 것을 다툼이라는 사건을 통해 롯과 분리시키셨다. 마치 가인과 아벨 사건에서 두 계열의 성격이 제사 문제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듯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제단을 쌓게 하신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8절). 제단이란 앞에서 노아가 쌓은 번제를 통해 보았듯이 ‘미즈베아흐’, 즉 ‘죽이는 장소, 죽음이 담기는 곳, 죽는 곳’이라는 뜻이다. “헤브론”은 ‘연합, 동맹’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람의 자기 죽음을 통해 언약 안에서 연합, 즉 하나 되는 은혜임을 계속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의 당사자가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 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갈 3:16). 그러므로 아브람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역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 그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선언과 약속의 땅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애굽 사건이 후손에 관한 약속의 구체적인 확인이라면 롯 사건은 땅에 대한 약속의 구체적인 확인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어떤 일이 성도에게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확인시키시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확인시키시는 방법이다.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으셨다는 것이 언약이고 그 언약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하라는 뜻이다. 십자가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그분의 의로움에 덧입혀진 죄인임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의 죽음을 발견함으로 그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2023061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43.1301-18 아브람의 출애굽(20230611).pdf
0.0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