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juqHydbiZS0?feature=share
창세기 강론 42
창세기 12:10-20
애굽으로 간 아브람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자마자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버리고 떠났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니까 아내와 한 마디 의논도 하지 않고 단번에 바쳤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성전(?) 건축을 위하여 집 하나 팔아서 바치지 못하느냐는 식으로 본문을 곡해한다.
이런 식의 강조가 더 심화하여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오해한다. 거기에다가 긍정적 사고방식까지 가미하여 그것이 마치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과는 관계없는 아전인수격의 성경해석이다. 아브람은 처음부터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어떻게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시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7-8절)라고 말씀한다. 아브람이 자기 의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란에 안주하는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들이셨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단순히 아브람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이미 앞의 강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후손(씨), 땅, 복(이름)”에 대한 언약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것을 위해 아브람이 선택된 것이고 그 선택을 통해 믿음으로 이루시는 언약의 실체를 보여 주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아브람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신을 이름을 내어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남방”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새번역에서는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라고 번역하였고 쉬운성경에서는 “계속해서 가나안 남쪽 네게브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히브리어 ‘네게브’는 ‘마른 땅’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마른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인도하셨는데 마른 땅이었다. 그럴 때 아브람에게 드러나는 것은 자기 생존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광야로 이끄셨던 것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것으로 언약의 궁극적인 의미를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언약으로 주신 율법의 말씀에 철저히 실패하였다. 그 실패를 회복하고 성취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광야 시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로 오셔서 신명기의 말씀으로(신 8:3, 6:16, 6:13) 시험을 이기셨다. 이는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분명히 확인시키시는 과정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10절). “거류하려고”라는 말의 히브리어 ‘구르’는 ‘머무르다, 체류하다, 거주하다, 우거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기근이 있어서 잠시 ‘애굽’(히, ‘미츠라임’ 10:13)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굽에서 거주하기 위해 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라고 하셨고 친히 이끌어 들이신 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근이었다. 가뭄이라 굶주림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 땅은 자손에게 주신다고 하신 땅이지 엄밀하게 말하자면 ‘약속의 땅’이라는 의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니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가나안 땅을 고수하면서 거기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20:12에서 아브람이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라고 말한 것을 보면 누이라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당시 부족사회에서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계책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믿음으로 출발하였다는 식으로 보게 되면 가나안 땅에 들어와 가뭄을 만나 죄악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나 애굽 여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신앙의 타락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는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믿음’으로 떠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귀결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분명히 아브람의 실수요 불신앙에 의한 행동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질책(징계)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결코 그런 내용을 보여 주고 있는 곳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브람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으로 볼 수 없고, 또 여기서 애굽으로 간 사건도 신앙의 타락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애굽으로 이끄셨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11-13절).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차는 열 살이었다(17:17).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나이가 75세이니 적어도 사래의 나이는 65세가 넘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래는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브람은 한 부족의 수장으로 바로를 대면하면 화친을 위해서라도 누이나 딸을 주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14-15절). “이끌어들인지라”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라카흐’인데 ‘취하다, 강탈하다, 아내로 삼다’라는 뜻이다. 2:23에서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라고 하였을 때 “취하였은즉”이라는 말과 3:6에서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고 하였을 때 “따 먹고”라는 표현이 ‘라카흐’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아브람이 사래를 바로에게 바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취하였다는 것이다. 아내로 취하였다는 것은 사래를 통해 바로의 자손이 이어지는 것이다. 바로의 자손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관계없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래의 태를 막아 놓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라고 이미 밝히셨다. 아브람과 사래의 관계에서 후손이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후손(씨), 땅, 복(이름)”을 주시기로 하셨고 언약을 위해 아브람과 사래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 주는 표현이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17절)라는 말씀이다. 바로가 취한 것은 단순히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자의 취함은 언제나 선악의 나무를 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아브람은 바로를 통해 자신이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하여야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을 위해 행하고 선악의 나무와 하나 되어 생존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언약의 방식으로 되돌리셨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내의 일로 많은 재물을 얻는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16절). 많은 재물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축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많은 재물을 허락하심으로 그것을 통해 언약으로 말미암는 복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18-20절). 흔히 아브람의 거짓말을 초점으로 삼아서 우리도 아브람과 같이 거짓말하지 말자는 윤리적 교훈을 주는 것으로 한국 교회 안에서는 엉터리 해석이 횡행한다. 그러나 아브람의 거짓말은 창세기에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수많은 사건들이 언약을 위한 말씀이라고 본다면 아브람과 같이 거짓말하지 말자는 교훈을 주기 위해 본문을 두 번씩이나 기록하였다는 것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언약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브람에게 있어서 애굽의 이 사건은 막연히 알았던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당시 애굽은 가장 강대한 나라였기에 바로 왕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세계의 왕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바로가 아브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분명 아브람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바로 왕보다 크고 위대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하였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라는 표현을 통해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루실 언약이 아브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자손은 단순히 혈통적 이스라엘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 이스라엘로 확대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바로에게서 사래를 구원해 내심은 단순히 아브람의 아내가 불쌍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 12:1-3에서 제시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보호하심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인 아브람과 사래를 통한 이삭의 출생 그리고 그 계열을 이어오실 여자의 후손(메시아)에 대한 톨레도트를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심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언약을 중심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인간 쪽의 실수, 부족함, 불성실이라는 죄성을 이용하여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나님은 언약대로 반드시 이루어 내신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이끄시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고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아브람이 믿음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6-58)
(2023060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 구약강론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4. 창세기 14:1-16 아브람의 전쟁 (5) | 2023.06.18 |
---|---|
43. 창세기 13:1-18 아브람의 출애굽 (0) | 2023.06.11 |
41. 창세기 12:1-9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 (0) | 2023.05.28 |
40. 창세기 11:27-32 데라의 족보 - 여섯 번째 톨레도트 (0) | 2023.05.22 |
39. 창세기 11:10-26 셈의 족보 - 다섯 번째 톨레도트 (1) | 2023.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