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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41
창세기 12:1-9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
아브람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는다(수 24:2-3). 믿음과 전혀 상관없는 상태에 있던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언약을 맺으셨다고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절). 11:32에서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라는 말씀에 이어져 있으니 본문만 보자면 데라가 죽었기 때문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아브람에게 처음 나타나신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7:2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이미 나타나셨고 그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던 것이다(11:31).
분명 처음부터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가는 여정의 주도권은 분명 데라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데라의 가족은 하란에서 머문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5절)라는 말씀을 통해 볼 때 하란에서 모은 소유가 많았다는 것은 거기서 머무르며 재산을 불리는 것에 재미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하셨던 가나안 땅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이미 지난 강론에서 아브람에서 요셉까지의 생애를 도표로 보았듯이 이때 데라는 145세의 나이로 살아 있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4절)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데라가 죽었으니까 아브람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말씀이 주어지니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갈라놓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5절)라고 말씀에서 히브리어 성경에는 “마침내”라는 표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경에 집어넣어서 의역을 한 것을 그만큼 하나님 편에서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 땅으로까지 인도하셨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땅을 포함한 하나님의 약속은 2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2-3절).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을 정리하자면 “내가 네게 보여 줄 땅”(1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말씀이다. 즉 “땅”, “후손”(씨), “복”(이름)이다.
먼저 “후손”(씨)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이다. 여기에 쓰인 “민족”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고이’는 혈연관계에 있는 어떤 ‘한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잡다한 민족이 섞인 나라’ 혹은 ‘한 통치 아래 있는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의도하신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선택하셔서 혈통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를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한 다스림 아래 있는 나라를 의도하고 계획하셨다. 그래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에서 “후손”(씨)에 대한 표현은 언제나 단수로 쓴다. 그 의미를 바울 사도가 이렇게 밝혀준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아담에게 주셨던 여자의 후손 그 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신약에서 드러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신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 “후손”(씨)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로 오셨고(마 13:3, 막 4:3, 26) “씨는 하나님의 말씀”(눅 8:11)이라고 하였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요 1:1) 이 땅에 오시는 것만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피조 세계가 말씀 안에 새롭게 세워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복”(이름)에 대한 말씀을 보자.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하였는데 직역을 하면 ‘너는 복이다’라는 말이다. 즉 아브람이 복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고 아브람 안(후손 중)에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저주”란 “복”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저주의 상태 그대로 두시겠다는 뜻이다.
죄인들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 성과 탑을 쌓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는 곳을 정하셨고 그것을 언약으로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람이 복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하심으로 셈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하신 그 언약대로(9:26-27)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람의 이름이 되시기로 하셨다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궁극적으로 한 사람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신약에서는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이제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믿음으로 살았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부르신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며 복이라고 표현한 것이다(롬 4:16-18). 아브라함이 복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창조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창 1:28)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하여 회복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결국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복도 바로 언약의 성취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행 3:25-26).
그래서 신약에서는 더 이상 복을 세상의 것을 누리는 것이나 물질적인 소유의 의미로 말씀하지 않는다. “신령한 복, 후사, 기업” 등의 표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을 아브라함 언약을 배경으로 한 표현들이다(참고 히 9:15, 롬 4:13, 엡 1:3, 5:5, 행 20:32, 벧전 1:3-4, 3:9 등).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7-9)
그러면 “땅”에 대한 말씀도 단순히 가나안 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그의 생애에 가나안 땅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아브람이 소유한 가나안 땅은 아내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 구입한 “막벨라 밭 굴”이 전부였다(23:16-20). 또한 가나안 땅을 주신다 하더라도 사백 년 동안 이방에서 종이 되었다가 나중에 차지한다는 것이었다(15:13-14). 이런 점에서 “땅”에 대한 약속도 아브람에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그런 언약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언약을 통해 땅에 대한 언약의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5절)라는 말씀에서 “들어갔더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보’는 ‘하나가 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하나님의 언약으로 부르심은 약속의 땅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라아’는 단순히 보여준다는 정도가 아니라 ‘보게 하다, 주목하게 하다, 느끼게 하다, 알게 하다’라고 히필형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보게 하고 알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땅에 대한 약속도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람과 그 후손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날마다 그분의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가나안 땅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은 각기 다른 내용의 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약속 성취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언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6-9절). 그러나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람에게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은 주인이 없는 땅이 아니었다. 이미 가나안 족속들이 자기 땅임을 주장하는 주인이 있는 땅이었고, 갈대아 우르와는 전혀 다른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가나안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이란 것 외에는 아무 의미를 주지 못했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가기 위해 아브람은 자신의 삶의 기반이 되는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땅의 것으로 든든히 하고 땅에서 잘 살기를 원하는 세상에 아브람을 세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존재이다.
(2023052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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