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78강 로마서 15:22-29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불편한 진리 2022. 5. 30. 12:12

https://youtu.be/qCpiK-I7ivQ

 

❖ 로마서 일흔여덟 번째 강론

 

로마서 15:22-29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성경 해석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교회라는 조직체,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제도권 속에 있는 교회의 틀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말씀이 언제나 교회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필요한 결론을 도출하여 적용한다. 예컨대 오늘 본문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 비전, 그리고 연보(헌금) 이런 것들을 오늘날 교회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말씀을 계속 살펴보면서 확인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엄청난 사명감과 원대한 꿈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충만하게 전한 것은 바울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몸된 교회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곧 말씀의 성취라는 차원임을 바울 사도는 분명히 밝혔다. 다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이끌려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 사도는 다시 로마 방문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22-24절).

이 말씀을 쉽게 생각하면 바울이 서바나(지금의 스페인)까지 선교하고자 하는 일에 로마 교회에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지금 개인적인 선교 비전으로 서바나까지 가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로마 교회에 전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그런 차원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일에 로마 교회가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본문을 계속 면밀하게 살펴온 대로 보자면 그런 뜻이 아니라 당시에 ‘서바나’를 땅 끝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이 충만하게 땅 끝까지 증거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성취 안에서 서바나까지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이다. 여기에 로마 교회도 주님의 몸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로 전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선교 비전을 말한 것도 아니고 자기의 선교에 대한 욕심을 이루기 위해 로마 교회가 희생해 줄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복음 되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차원에서 로마 교회가 그 교제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당연하기에 바울은 서바나까지 가고 싶다고 밝히며 로마 교회의 성도들도 이 일로 한몸됨을 확인하자는 것이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교회의 어떤 일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일거리를 만들어야 주께서 복음을 증거하시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피와 땀이 어린 교회를 크게 키우고자 하는 공명심과 명예욕으로 전도와 선교를 외치고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떠드는데 이는 말씀과 상관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과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가 일하지 않아도 주님은 알아서 자기 복음을 증거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복음을 위하여 바울을 동원하셨다. 바울이 없었으면 안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없었으면 이방인에게까지 어떻게 복음이 충만하게 증거될 수 있었을까를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바울 같은 율법주의자요 교회의 훼방자요 핍박자라 할지라도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한 몸으로 연합시키신 은혜가 바울로 하여금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다.

오히려 바울이 자기 욕심대로 하고자 했을 때 성령께서 막으셨다. “여러 번 막혔더니”라는 말이 헬라어로 ‘엥콮토’(방해하다, 훼방 놓다)인데 수동태로 표현하였으니 ‘방해 받았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여러 번 로마에 가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인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끌어 가시는 모습이다.

로마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 바로 로마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25절)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이 이방 땅으로 전파되고 있는데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바울 사도가 로마를 통해 서바나까지 가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엄청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를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26절)라고 밝힌다. 즉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방인으로 여기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얼마의 후원금을 마련하였기에 바울이 그것을 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여기서 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일까? 우리 성경에 “연보”(26절)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교제, 참여, 나누어줌)이다. 25절에서 “섬기는 일”은 ‘디아코네오’, 26절의 “연보”는 ‘코이노니아’, 27절의 “나눠 가졌으면”은 ‘코이노네오’라는 말인데 이 세 단어가 전부 다 ‘코이노노스’(동료, 참여자)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그리고 “연보”라는 말을 다른 번역본에서는 “구제금”, “기부금” 등으로 표현하였고 공동번역성경에서는 25절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을 “구제금”이라고 번역하고 26절에서는 “정을 나누려고”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 성경에 “연보”라고 번역된 말이 단순히 돈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 성도를 위하는 연보(로기아)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로기아)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고전 16:1-4)

 

 

여기서 “연보”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로 ‘로기아’이다. 이는 ‘레고’(모으다)에서 유래하였으며 ‘수금, 세금, 기부금, 모금’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마게도냐 교회들의 상태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 고린도후서 8장에 잘 나타나 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하플로테스)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디아코니아)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이 본문에서 “연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하플로테스’인데 ‘순수함, 정직함, 관대함’을 의미한다. 마게도냐 교회의 상황도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관대함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풍성하게 연보를 넘치도록” 한 것이고 이것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은혜란 고린도후서 8:9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밝힌다.

이런 점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고 사랑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본문 27절에서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다. 신령한 것을 받았으면 육신의 것은 버린다는 차원에서 나누어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고 사랑이기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28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라고 하였는데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헌금한 돈을 열매라고 하였을까? 결코 그렇게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서로를 향해 베푼 구제나 동정의 차원이 아니라 성도를 섬기는 일이고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는 교제의 일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8장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2-15)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란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그 자체이다. 균등하게 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데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던 사건을 언급하였다(출 16:19-20). 만나는 다음날 분량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셨다. 매일의 만나를 통해 이스라엘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으며 안식일에는 쉬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는 이런 하나님 나라를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보여주는 것이다(14:17).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도 물질적인 얼마의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돕게 된 것과 같은 모습으로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나누는 이것이 한몸된 교회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29절)라고 쓴 것이다. 여기서 표현한 “복”이란 ‘율로기아’인데 ‘유’(좋은)와 ‘로고스’(말, 말씀)의 합성어이다. 세상적 개념의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넘치는 좋은 말씀, 즉 복음으로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울 사도의 간절한 마음이다.

결국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나누는 이 일 때문에 로마에 가기를 원하고 또한 서바나까지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여기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의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는 것으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증거하였다. 복음 안에는 이방인, 유대인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안에서는 모두 하나로 복음을 나타내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이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아니 십자가의 은혜가 임한 자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채워져 나누는 것, 이것이 연보이고 교제이다. 그러므로 교제란 교인끼리 사생활을 이야기하며 잡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한 성령께서 복음 안에서 같은 말을 하게 하시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202205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78.1522-29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2022052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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