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75강 로마서 15:8-13 그 믿음 안에서

불편한 진리 2022. 5. 1. 16:56

https://youtu.be/I5SMyMKfMP0

 

❖ 로마서 일흔다섯 번째 강론

 

로마서 15:8-13

그 믿음 안에서

 

 

오늘날 교회들은 기독교를 많은 종교 중에서 가장 우수하고 독보적인 종교인 것으로 인식되도록 가르쳐 놓았다. 다른 종교에는 없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 믿음을 강조하였지만 그 믿음은 자기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믿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죄인들은 그 믿음이 그저 내 안에서 만들어낸 믿음인 줄로 착각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강을 건너는 데 있어서 예수를 다리나 배의 역할 정도로 생각하고, 강을 건넜으면 다리를 부숴야 하고 배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복음을 알았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하여 육적인 예수를 죽이고 영적인 그리스도로 살아나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와 그리스도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오셨기에 예수와 그리스도가 결합된 주님이시다.

로마서 11:36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자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기초하고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드러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만물과 모든 일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 위해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시켜 생각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주셨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셨다(요 16:8-11). 한 마디로 죄인이 하나님의 의에 합류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 행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내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7절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서로 받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몸으로 우리를 영접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을 지난 강론에서 확인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오늘 본문 8절에서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 번역이 되지 않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8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라고 표현하였는데 헬라어로는 ‘엘레데이아’로 ‘진리’라는 말이다. “할례의 추종자”를 개역한글판에서는 “할례의 수종자”라고 번역하였고, 새번역성경에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라고 번역하였다. 헬라어로는 ‘디아코노스’(주인의 종, 식사의 시중을 드는 자, 섬기는 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할례의 종으로서 섬기는 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에 있는 죄인의 모습으로 할례를 받으심으로 언약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섬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마가복음 10:45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의 섬김은 자기 목숨을 죄인들에게 대속물로 주시는 섬김이고 그것이 한 마디로 십자가이다.

그리고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라고 하였는데 “견고하게” 하셨다는 것은 확증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할례의 종이 되어 자기 언약 백성들을 이렇게 섬기심으로 구약의 조상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신 것을 온전히 성취하여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언약의 온전한 성취는 단순히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음식의 문제로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9절)라고 선언하면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한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셨다고 해서 십자가가 유대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여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영접이다. 그래서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구약에서 자기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이지 하나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을 주신 이유는 제사장 나라로 세워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언약의 복이 전달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하나님의 긍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말씀은 시편 18:49인데 좀 폭넓게 보자.

 

 

43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4 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 48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위에 나를 높이 드시고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50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시 18:43-44, 48-50)

 

 

이 시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라고 서두에 언급하였다. 단순히 다윗의 원수만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다윗에게 굴복하는 것을 통해 언약의 원수를 굴복시키는 약속의 성취를 미리 내다보고 감사와 찬송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의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름을 가지신 분으로 오실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10절)라고 신명기 32:43 말씀을 인용한다.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 32:43)

 

 

모세의 노래인데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라고 표현한 그 말씀이 단순히 이스라엘만 지칭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 사도는 속죄를 이루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 자기 백성들을 포함한 열방이라고 이해하고 그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 또 시편117:1을 인용하면서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11절)라고 하였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시 117:1)

 

 

시편 기록자가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라고 한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주를 찬양하며”라고 ‘여호와’를 ‘주’로 바꾸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말씀으로 나타낸다. 즉 “모든 나라들”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질 자기 백성들이라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 사도는 모세오경, 시가서 선지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12절)라고 하였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사 11:1-2, 10-11)

 

 

다윗의 후손 중에 하나님의 영이 강림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고 그의 손을 펴서 이방인 중에서도 남은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신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고 생각해야 할 것은 “이새의 뿌리에 한 싹”이 난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쉽게 다윗의 뿌리가 이새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는 다윗의 뿌리가 이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은 그 이새의 뿌리가 오실 메시아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메시아는 다윗이나 이새의 열매가 아닌 이미 뿌리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는 이사야 선지자가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라고 한 말씀을 바울 사도가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라고 그 표현을 바꾸어 놓은 것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소망의 하나님”으로 말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절)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는 이미 4절에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라고 선언했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인 우리가 소망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내를 주시고 위로를 주신다. 다시 말해서 소망을 가지도록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인내와 위로에 머물러 있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망”이란 단순히 천국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내와 위로에 머물게 하신다는 차원에서 믿음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14:17)이라고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표현한 것이다. 즉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믿음 안에서”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대로 말하자면 ‘그 믿음 안에서’라는 말이고, 곧 예수님의 믿음을 지칭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라는 말씀에 나의 행위가 개입될 여지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언약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을 채우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요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감사와 찬양뿐이다(2022050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75.1508-13 그 믿음 안에서(2022050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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