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80강 로마서 16:1-2 교회의 일꾼

불편한 진리 2022. 6. 12.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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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여든 번째 강론

 

로마서 16:1-2

교회의 일꾼

 

 

성경의 어떤 한 책을 내리읽을 때 레위기나 마태복음 1장과 같이 대충 적당히 읽고 넘어가는 부분이 로마서 16장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이름만도 36명이고 그 외 이름이 없는 많은 사람들을 굳이 다 확인할 필요도 없고 서신의 마무리 인사 정도로 보고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내게 필요하고 자신의 어떤 상황에서 특별하게 인식되었던 부분, 흔히 하는 말로 은혜(?)받았다고 생각하는 구절에 밑줄을 치고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성경을 보아도 공자의 논어나 노자의 도덕경에서 좋은 문구를 골라내어 활용하는 것처럼 한다.

이처럼 우리는 말씀을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씀을 적용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씀은 활자로 죽어 있고 자신은 살아 있다는 입장에서 성경을 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활력이 있어 말씀이 판단하여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게 되어 있다(히 4:12).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삶의 방향성이 자기 자존심을 세우고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에 있느냐 아니면 십자가로 잡혀 있느냐 하는 차이로 나타난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에서 성경의 어떤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떤 부분은 중요하지 않고 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때 왜 계시로 주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성경을 보면 수많은 인물의 수치스러운 일이나 개인적인 일도 많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계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의 개인적인 친분,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단순히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많은 사람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으로 교훈을 받고 우리도 교회에서 바울 사도와 같이 시기와 질투를 버리고 많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폭넓게 가지고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 가라는 것인가? 성경은 지금 그런 개인적인 친분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셨다는 사실은 바울 사도가 교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그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 역시 단순히 바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또 개인적인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다면 본문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말씀하고 그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15장까지 계속 살펴보았던 내용의 중심은 바울 사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생각했다. 사도가 서바나까지 가려고 하는 것은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비전이나 선교적 욕망이 아니었다. 말씀대로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바울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측면에서 생각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을 이끌고 가는 형식으로 성경은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16장도 바울의 개인적인 친분이 선교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측면으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1절에 보면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라고 했다. “일꾼”(헬, 디아코노스)이란 ‘(식사의) 시중을 드는 자, 주인의 종’이라는 뜻인데 바울 사도는 우리 성경에서 이방 권세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역자”(롬 13:4), 에베소서 6:21에서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으로 번역하였고, 빌립보서 1:1, 디모데전서 3:8 등에서는 “집사”라고 번역하였다. 이 단어의 의미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로 표현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심에 있다고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밝힌다.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4-25)

 

 

일꾼이든 사역자든 섬기는 자이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일꾼”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로서 “하나님의 일꾼”(고후 6:4)이며, “그리스도의 일꾼”(딤전 4:6)이다. 바울 사도는 자매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한다고 하였는데 “추천하노니”(헬, 쉬니스테미)라는 말은 ‘쉰’(~와 함께)과 ‘히스테미’(세우다)의 합성어로 ‘함께 서다, 결합시키다, 연합시키다’라는 뜻이다(참고, 골 1:17). 즉 로마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들이 있다면 뵈뵈는 그들과 함께 세워지는 성도요 교회의 일꾼이라는 의미이다.

바울 사도는 지금 당장 직접 갈 수 없고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라 뵈뵈를 통해 본 서신을 로마 교회에 전달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이때가 주후 56-57년경이었고 그후 바울은 약 60년경에 로마로 압송된다). 그래서 2절에 보면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2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예절’이라고 하면 우리는 공자의 가르침에 나오는 ‘예’(禮)나 ‘예절’(禮節)에 대해 생각하기 쉽다. 교인들 간에도 깍듯하게 예절을 잘 지켜야 하고 또한 그런 교인들이 참으로 신실한 성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례하고 예의가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어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접받기를 원하고 젊은 사람들이 인사를 잘 하지 않거나 공손하지 않으면 예의가 어긋나 있고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야단을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예의를 갖추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본문은 “주 안에서”라고 하였고 또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미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예의범절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상의 존재인 성도라는 관점에서 말씀한다.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6-7)

 

 

성도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부르심을 입어 거룩하게 된 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자이다. 로마서 12:1-2의 말씀대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동참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 곁에 굳게 세워져 말씀의 섬김에 참여된 자로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 자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예의범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십자가를 전제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됨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결국 영역적인 면에서 주님 안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의 모든 정욕을 못 박은 상태를 의미한다. 즉 날마다 죽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란 인간 개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그의 몸의 상태가 된 교회로 뵈뵈를 대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상태의 모임이다(6:1-4).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자기 기준의 선악 체계를 가지고 상대를 대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생존경쟁에서 적으로 간주하고 상대를 밟고 죽이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죄인의 최초 모습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미움이 형제를 죽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불순종이 상대를 질타하고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것만이 죄에 대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를 풀 길이 없었었다는 뜻이다. 이 땅의 어느 누구도 화목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서로를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해서 화목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죄인들과의 관계를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평강과 희락이다(14:17).

우리 안에는 주님께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도 없고 존중할 마음도 없다. 그저 자기 자신만 알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고귀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자식은 또 다른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온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성도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임한 증거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9-12)

 

 

결국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친분을 말하는 것이나 개인적인 바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주 안에서 합당한 예절에 의해 영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면 우리는 사랑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자는 식으로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자기 사랑을 보여주며, 보이는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목회자 덕분에 구원의 은혜를 누려보자는 것에 있다. 나 대신 누가 완벽하게 살아주기를 기대하면서 성경을 배우고 있으면 천국가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훌륭한 사람, 완벽한 지도자, 자신의 모든 것을 대신해 줄 목회자나 영웅을 세우시지 않는다. 아니 이미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세우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자를 못난 자로 세우신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우리가 전달받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의 약한 자들, 미련한 자들, 천하고 멸시 받는 자들, 자신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내세울 것이 없는 자들을 부르셨다. 일부러 이런 자들을 특별히 불렀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본래 이런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나 일이 인간의 생각이나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만 인정하고 그 일만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교회요 성도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 사랑 안에 들어와 있기에 그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아 십자가로 한몸됨을 확인하게 하시는 모임이고 그런 자가 교회의 일꾼이다(202206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80.1601-02 교회의 일꾼(202206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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