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79강 로마서 15:30-33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불편한 진리 2022. 6. 5. 14:58

 

https://youtu.be/PYcotn1X9RE

 

❖ 로마서 일흔아홉 번째 강론

 

로마서 15:30-33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로 생각하는가? 문제는 기독교인들만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인들도 기도하고 수많은 종교와 이단들도 기도를 하며 심지어 아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도 자신과 자녀들이 잘되기를 기도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기독교인의 기도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산상수훈에 보면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라고 말씀한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는 문제에 한정되어 있기에 중언부언한다고 하였다. 이때 중언부언이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마 6:7)하는 것이다. 즉 지극한 정성으로 계속 끈질기게 구하면 된다는 생각이 중언부언이다.

이방인들의 기도가 이러한 이유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신에게 하는 기도이기에 그렇다. 신으로부터 계시된 것이 없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니 자신의 지극한 정성으로 신을 감동시키기 위해 많은 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자녀의 필요를 아신다고 말씀한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14:16)이다.

바울 사도는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다. 사도행전 곳곳에 보면 바울을 따라다니며 방해하고 죽이려고 했던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행 14:19, 18:5-6 등). 바울이 오기만 오면 잡아 죽이려는 극렬한 유대주의자들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율법에 매여서 바울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한 얼마의 기부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성도들과의 교제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입장에서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에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30절)라고 하였다. 직역하면 ‘내가 형제들아 예수 그리스도 우리들의 주를 인하여 또 나와 함께 힘을 모아 싸우는 그 성령의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 나를 위한 그 기도를 권한다’라는 말이다.

“힘을 같이하여”라는 말의 헬라어는 ‘쉬나고니조마이’인데 ‘쉰’(~와 함께)과 ‘아고니조마이’(싸우다)의 합성어로 ‘함께 싸운다’라는 뜻이다.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해 다시 또 “형제들아”라고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즉 바울 사도는 개인적으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로서 같이 싸우는 이 전쟁에 동참되어 있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에 근거하여 말한다. 앞에서 누차 나누었지만 바울 사도가 서신에서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됨을 의미하는 ‘우리’이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가?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31-32절)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바울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손에서 구출되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목적대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교제하고 또한 로마에 가서도 그곳 성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함께 편히 쉬게 하라”(헬, 쉬나나파우오마이)라는 말은 ‘함께 원기를 회복한다’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가 왜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 두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져 있었던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로마서 앞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두루 행하여”(15:18-19a)라고 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복음이 전해질 뿐이라고 밝혔다(15:15).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드러내시는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신 것을 바울의 손끝에 달아 놓으신 것뿐임을 바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서 혹 죽는 일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결코 억울한 일이거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의 상황을 우리는 사도행전 20-21장을 통해서 바울 사도의 심정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다.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밀레도에 들러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행한 강론에서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행 20:23-25)라고 했다.

예루살렘에 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바울도 알고 있었다. 이미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에 가아사랴에서도 바울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다. 이때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에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은 두려움에 떨면서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개인적인 요청이 아니었다.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는 일에 바울은 사도로 종으로 붙잡혀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바울이 기도를 요청한 것은 이 일이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거나 인간의 힘에 의해 유지되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써 함께 복음을 위해 싸우는 이 싸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드러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 즉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죄인이라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성과 십자가를 확인한다. 결국 성도는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고 또한 모든 일들을 말씀 성취라는 차원에서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바울이 기도를 요청한 것은 바로 이런 차원이다.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는 이 대단한 일에 로마 교회를 향해 너희들이 돕지 않아서 되겠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것은 밑져봐야 본전이니까 너희들도 기도해서 내가 복음을 잘 전하게 지원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주께서 복음을 증거해 나가시고 그 일에 바울 사도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하게 함으로 복음을 드러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와 힘을 같이하여”(30절)라고 했고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32절)라고 했으며, 33절에서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바울을 로마 교회가 도와주어야 일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같은 복음을 나누는 하나, 한 몸이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라면 땅끝까지 복음을 드러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도로 표현한 것이다. 로마서 서두에서도 이미 이렇게 밝혔었다.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5-7)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32절)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 기도하되 각각 다 자기 일로 기도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한 몸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간다는 것은 곧 복음을 드러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함께 좇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함께 기도하는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렇게 밝혔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1-4, 5)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로 넘겨주심으로 대속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근거하여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 곁에 산 제물로 굳게 세우신 이것이 말씀의 섬김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으로 확정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이루신 것에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9-10)

 

 

여기서 “평강의 하나님”(33절)을 강조한 것은 단순히 서로 다투지 말고 잘해보자는 차원에서 인사하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세상이 주는 평강과는 전혀 다른 평강을 맛보게 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과의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에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평강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14:16)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평강과 기쁨을 로마 교회와 함께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나타낸 것이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는 차별이 없는 의다. 바울에게 주어진 의는 조금 특별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의는 시시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증거되는 일을 위해 바울 사도가 기도했고 그와 함께 로마 교회가 기도해야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기도에 동참되어 있다. 특별한 무슨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복음을 드러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한 몸으로 동참되어 있음을 확인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에게는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나는 기도만 나올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도한다는 것, 아니 성도에게서 나오는 기도는 자신의 부족과 죄인 됨을 알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고. 복음이 증거되는 일, 땅끝까지 십자가를 드러내시는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고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복음에 굴복된 자가 그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드러내시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 안에서 인정하고 확인한다는 의미이다(202206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79.1530-33 하나님의 뜻을 따라(2022060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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