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76강 로마서 15:14-16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불편한 진리 2022. 5. 15. 15:22

https://youtu.be/Bnjekx9sdcw

 

❖ 로마서 일흔여섯 번째 강론

 

로마서 15:14-16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세상은 교회를 많이 오해하고 있다. 아니 오해하고 있다기보다 자기 방식으로 교회를 정의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종교적인 모습이 외형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때 종교적인 모습이란 성경을 그저 문자적으로 이해한 수준이다. 그래서 말씀을 문자적으로 가르치고 그대로 몸소 실천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이면 그 목사를 훌륭한 목회자로 여기고 사람들이 모인다. 자기도 그 범주 안에 넣고 싶은 것이다. 그 범주 안에 자신을 넣어놓고 그 길을 따라가면 천국 갈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여기에 하나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교회, 하나님, 예수, 십자가, 천국’이란 용어 대신 ‘불경, 법당, 부처, 고행, 성불, 극락’ 등의 단어들로 바꾸면 어떤가? 종교적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 불교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다른 어떤 종교들을 대체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교회들의 전도지를 보면 그저 주차장이 잘 갖추어진 식당 내지는 자기 필요에 의한 물건 선택이 가능한 편의점 같은 교회로 인식되는 광고로 넘쳐난다. 전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교회니까 편안하게 방문하라는 강조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복음은 내가 좋아서 선택하고 싶으면 선택하고 싫으면 거부할 수 있는 장난이 아니며 놀잇감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문제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만 생명이라고 선포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이루어 놓은 교회라는 조직체를 가지고 십자가를 가린다. 교회를 자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가 선전하는 목사, 교회, 전도, 기도, 십일조, 성령을 부르는 집회, 사회 봉사활동, 많은 이벤트 등 이런 온갖 종교적 행위로 십자가를 가로막는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통해 그토록 강조한 은혜의 복음에는 전혀 집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다.

15:8-13에서 바울 사도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대표적으로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신 것은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언약임을 피력했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신 그 믿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을 채우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요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드러난다는 말씀을 확인했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란 우리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을 지칭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과 동의어임을 생각했었다.

이런 점에서 ‘믿음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나의 행위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인간의 의지로 소망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의와 평강과 기쁨을 스스로 충만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에 놓여 있음을 고백하면서 그 길을 묵묵히 갈 수 있게 하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으로 채워 이끄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 없어서 주를 좇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죄인이기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한순간도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14절). 헬라어 성경에서는 “확신하노라”라는 ‘페이도’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온다. 강조한다는 뜻인데 수동태로 되어 있으니까 ‘확신하게 되었다’라는 말이다. 즉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당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참고 8:38, 14:14).

“선함이 가득하고”(헬, 아가도쉬네)라는 말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넘겨받은 선’이고, “모든 지식이 차서”라고 할 때의 지식은 ‘외부에서 주어진 지식’이라는 말이다. 즉 자신에게서 나오는 선함이나 지식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넘겨받은 선’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그래서 이 표현이 다 수동태로 되어 있다. 직역하면 ‘너희 자신들의 선함이 계속하여 가득차 있고 모든 지식과 서로 권면할 능력이 넘쳐남을 내가 확신하게 되었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라고 한 것은 단순히 로마 교회에 있는 자들을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한 말씀에서 생각하였듯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 곁에 거룩한 산 제물로 굳게 세워진 자’라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서신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유를 그다음 절에서 밝힌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15절). 개역한글판에서는 “대강”이라고 번역하였고 개역개정판에서는 “대략”이라고 표현하였기에 바울 사도가 대충 쓴 것 같은 느낌을 갖는데 헬라어로는 ‘메로스’라는 말로 ‘부분, 몫, 일부분’이라는 뜻이다. 즉 바울 사도가 어떤 부분은 굉장히 강조하여 썼다는 것이다.

음식이나 날에 대해 율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이나, 율법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서로 민감하여 갈등을 일으킬 부분들이 혹시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부분들에 대해 바울 사도는 회피하거나 적당히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하게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로 인해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성도들에게 그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생각나도록 확인시키고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1장에서도 이렇게 선언하였었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9-12)

 

 

바울 사도가 로마 방문을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복음(신령한 은사)을 나누어 로마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함께 진리로 굳게 세워지기를 원해서이다. 로마 교회 성도들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함께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 위로를 얻고 격려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복음 안에서 같은 믿음인 것을 서로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란 어떤 것인가?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16절)라고 밝힌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복음에다 구약 용어를 붙인다. 제사장의 직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성전제사에서 동물을 잡아 피를 흘림으로 속죄를 보여주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언약의 실체가 오실 때 피를 흘리는 것으로 자기 백성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희생을 보여주는 자가 제사장이다. 그 언약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1-15)

 

 

구약의 제사장은 한계가 있는 자들이었다.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먼저 자기 속죄가 이루어져야 하는 자들이었다. 그 한계를 넘어서려면 이 땅의 존재가 아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죄 없는 존재로 하늘과 땅을 잇는 중보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보자란 사람들이 볼 때는 하나님이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완전한 사람이어야 한다. 바로 그렇게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넘겨주심으로 제사장직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이미 12:1에서 밝혔듯이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복음의 제사장이 되어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는 철저히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것이었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이는 단순히 바울 자신이 개인으로 선택되어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14절에서 “내 형제들아!”라고 한 말씀을 통해 보자면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당해 다시 복음을 서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자는 의미에서 로마 교회에 서신을 보낸 것을 생각해 보면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로써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참고 출 19:6, 사 61:6).

그렇다면 결국 바울 사도가 말한 이방인이란 단순히 유대인과 구분한 이방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들이 아닌 모든 자들을 이방인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방인을 성령 안에서 거룩한 제물로 세우는 자가 복음의 제사장인데 그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우리가 이런 사명을 가지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라면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된 왕이요 제사장으로 오직 복음을 드러내는 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언제나 고난 중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 삶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라고 하신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늘 거부당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이끄는 모습이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바울 사도가 할 수 있어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인내심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바울을 복음의 제사장으로 삼아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만드셨다. 바울을 이렇게 이끌고 가셨던 그 은혜가 오늘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끌려 가는 자가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이다(2022051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76.1514-16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2022051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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