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오전강론)

제77강 로마서 15:17-21 예수 그리스도의 일

불편한 진리 2022. 5. 2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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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일흔일곱 번째 강론

 

로마서 15:17-21

예수 그리스도의 일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신 이유는 속죄의 희생을 치루실 하나님을 이방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사장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써 실패하였고 진짜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로 완성하셨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여기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단순히 바울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몸이라면 바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제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한 것이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7절 이하에서 그것을 자랑하는데 우리 성경에는 몇 문장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17-21절까지 한 문장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7-18절a). 직역하면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자랑할 것을 나는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순종을 위하여 나와 함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는 자랑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로서 표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자랑거리이다. 이 말씀에서 주체는 바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하였는데 ‘순종’이란 헬라어 ‘휘파코에’는 ‘휘파쿠오’(듣다)에서 온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들리게 하는 순종을 위해 바울 사도를 사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만 전하고 말하기로 하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 성경에 “나를 통하여”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디아’를 ‘~을 통하여’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와 함께’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사도는 이미 1장에서 이렇게 천명한 적이 있다.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5-6)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의해 사도의 직분을 받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과 같은 의미이다. 이런 직분을 은혜로 주신 것은 이방인들을 순종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그래서 1:1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주 안에서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라고 선포하였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와 함께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다음 구절에서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18b-19절)라고 설명한다. “말과 행위”는 헬라어로 ‘로고스’와 ‘에르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말씀과 일’이다. 곧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 즉 ‘하나님의 영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 ‘표적과 기사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라고 같은 의미의 표현을 세 번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정리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을 바울과 함께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주님의 일이고 곧 표적과 이적의 능력, 그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표적, 이적, 능력 이런 것들은 바울이 나타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신 결과가 바울을 통해 나타났을 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기에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 외에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표적과 기사, 능력은 병 자체를 고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를 드러내시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죄인들이 흑암의 권세에서 놓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십자가임을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 능력으로 수없이 보여주시고 설명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저 능력, 이적 그 자체를 원했고 추종했으며 신기한 능력으로 베풀어지는 빵을 원했기에 십자가를 놓치고 말았다. 아니 예수님의 표적이나 능력이 십자가를 보여준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으로 십자가를 드러내셨다는 것은 인간의 죄성을 철저히 고발하신 것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일하셨던 성령님은 동일하게 바울과 함께 그렇게 일하셨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죄인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의 죄성을 자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인하여 도리어 자신의 죽음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라고 하였는데 “일루리곤”은 당시 마게도냐(마케도니아)의 북서쪽(오늘날로 말하자면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쪽)에 있던 로마의 행정구역이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실제적으로 다메섹과 아라비아 지방에서부터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행 9:19 이하, 갈 1:17 참고). 그뿐 아니라 사도로서 일하게 된 것은 안디옥에서부터였지만(행 11:25 이하, 13:1 이하) “예루살렘”으로 언급한 것은 사도행전 1장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다.

사도행전 1:8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다. 또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3:33, 18:31에 보면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고 하시며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을 것으로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증거된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복음이 확산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라고 한 것은 자신이 어디까지 전했는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증거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이만큼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을 계속 증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라고 하였는데 16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했던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임을 강조한다는 뜻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썼다. “편만하게”라는 말은 완료형으로 표현하여 이미 충만하게 채워졌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20절)라고 선언하였는데 여기서 “힘썼노니”(헬, 플로티메오마이)라는 표현은 ‘명예롭게 여기다, 영광스럽게 여기다’라는 말이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수동태) 곳에 복음을 전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다른 터 위에 집을 짓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즉 복음이 전해진 곳에는 굳이 자신이 전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20절만 따로 떼어서 생각한다면 바울 사도를 대단한 복음 전도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5절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가 바울의 생애 전체를 이끌고 왔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 바울을 붙잡아 놓고 그렇게 일하셨기 때문에 꼼짝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바울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라는 차원에서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21절)라고 구약을 인용한다.

 

 

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사 52:13-15)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내 종”이란 메시아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전한 것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복음을 드러낸다는 말이 아니라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깨닫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요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의 성취라는 것이다.

흔히 바울 사도에 대하여 말하면 우리는 그의 발밑도 못 따라갈 위대한 사도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재능과 학력,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 사회적 지위 등 여러 가지가 잘 준비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사용하셨으므로 우리도 잘 준비해 놓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것이라고 착각한다. 우리가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하나님은 자기 복음도 나타내지 못하고 수족이 묶인 것과 같이 꼼짝 못 하고 계신 하나님인가? 십자가는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증거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홀로 다 하셨다는 증거이다. 십자가는 나의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202205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77.1517-21 예수 그리스도의 일(2022052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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